많이 바쁠때는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든다. 막상 하루이틀 쉬게되면 모두 분주하게 살고 있는데, 나만 멈춰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가끔 바쁘게 살았던 사람들이 전혀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걱정스럽기도 하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호흡, 생각, 그리고 존재는 느릴 때 시작되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빠름을 미덕으로 삼는다. 더 빠르게 생각하고, 더 빠르게 판단하며, 더 빠르게 성취하는 것이 곧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속도는 과연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고 있을까? 인문학적으로 ‘느림’은 단순한 생활 방식의 선택이 아니라, 존재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존재를 다시 부르는 하나의 행위이다.

고대 철학에서 이미 느림은 중요한 가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관조(테오리아)’는 어떤 목적을 위한 사고가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그 자체를 의미했다. 그 사유는 느리다. 그러나 바로 그 느림 속에서 인간은 세계를 단순한 도구로 보지 않고, 의미를 지닌 대상으로 마주하게 된다. 반면 현대인은 모든 것을 ‘쓸모’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이때 느림은 비효율로 취급되지만, 사실 바로 그 느림 속에서 인간다움이 깨어난다.
하이데거는 기술 문명이 인간의 시선을 왜곡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게슈텔’이라 부르며, 모든 존재가 자원과 수단으로 전락하는 위험을 경고했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존재를 묻는 자’가 아니라 ‘계산하는 자’가 된다. 그러나 존재는 결코 빠른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직 멈추어 서는 자, 기다리는 자, 침묵하는 자에게만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느림은 그 드러남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장자의 무위 사상 또한 느림의 철학적 의미를 잘 보여준다. 그는 억지로 무엇이 되려 애쓰는 삶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과 함께 머무는 삶을 말한다. 느림은 경쟁에서 뒤지는 선택이 아니라, 경쟁 자체를 벗어나는 해방이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지만, 언제나 제때에 이른다. 느림은 인간을 다시 자연의 리듬 안으로 돌아가게 한다.
한나 아렌트는 사유 없는 삶의 위험을 경고했다. 멈추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생각하지 않게 되고,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책임질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느림은 윤리의 조건이기도 하다. 천천히 생각하는 행위는 자기 삶과 세계에 대해 책임지려는 첫 걸음이다.
느림은 때로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와 마주하고, 외면해왔던 질문들과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진짜 질문이 태어나고, 그 질문이 인간을 깊게 만든다. 느림은 쉬움이 아니라, 깊이로 향하는 길이다.
결국 느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을 잃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 세계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일이다. 빠름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천천히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다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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