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학

도시 인문학 25 - 스페인 톨레도, 경청의 도시

by Polymathmind 2025. 12. 13.

스페인의 중심부, 타호 강이 크게 굽이치는 지점 위에 톨레도가 자리한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거석처럼 솟아 있고, 그 위에 성벽과 궁전, 성당과 회당, 시장과 광장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톨레도를 마주하는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이 도시의 ‘밀도’다. 단순한 공간의 밀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명이 중첩된 시간의 밀도이다. 이곳에서는 과거가 퇴적되어 납작해진 것이 아니라, 층층이 살아 있으며, 서로 겹쳐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톨레도의 독특함은 중세 시기, 기독교·이슬람·유대교가 한 도시 안에서 의도치 않게 공존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구축되었다. 흔히 말하는 ‘세 문화의 도시’라는 단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11세기부터 15세기 무렵까지 톨레도는 세 종교가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도 이 도시라는 좁은 지형 안에서 공존해야 했다. 이들은 서로를 배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상업과 행정, 일상이라는 현실적 필요 속에서 얽혀 있었다. 이 공존은 균질한 조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때로는 긴장과 갈등, 심지어 폭력의 흔적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레도가 역사적 상징성을 획득한 이유는, 이 도시의 복잡한 긴장이 지적 창조물로 승화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히 12세기 이후 활발해진 ‘톨레도 번역학교’는 이 도시의 핵심적 유산이다. 당시 유럽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고, 이슬람 세계는 그 지적 전통을 아랍어로 보존하고 있었다. 톨레도 번역가들은 라틴어·아랍어·히브리어를 넘나들며 방대한 고전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번역했다. 이 과정에서 단순한 언어 변환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명권의 지적 체계가 접합되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유럽 스콜라 철학의 근간이 되기까지는 톨레도의 학자들(기독교 수도사, 아랍 학자, 유대 학자)은 한 공간 안에서 함께 책을 읽고 논쟁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톨레도는 지식이 번역될 때 단순히 내용이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유 방식 자체가 변형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이러한 다문화적 전통은 도시의 건축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톨레도 대성당은 고딕 양식이지만 곳곳에서 이슬람 장식 문양이 발견된다. 엘 트란시토 회당은 유대교 예배 공간이면서도 무데하르 양식(이슬람 영향의 스페인 건축)으로 지어졌고, 산후안 데 로스 레예스 수도원은 기독교 왕조의 승리를 기념하면서도 이슬람적 장식 요소를 곳곳에 남긴다. 이 건축적 혼종성은 단순 장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관이 공간 속에서 부딪히고 섞였던 흔적이다. 톨레도는 종교적 배타성이 완전히 종식된 공간은 아니었지만, 건축물을 통해 인간들이 서로에게서 배운 흔적을 돌 위에 새겨두었다.

예술적 측면에서도 톨레도는 독립적 지위를 가진다. 엘 그레코는 이방인으로 이 도시에 정착해 새로운 회화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인물들은 길게 늘어나 있고, 색채는 영적 긴장감을 담고 있다. 많은 연구자는 그의 독특한 회화세계가 톨레도의 종교·문화적 복합성을 반영한다고 해석한다. 서로 다른 믿음과 사상이 뒤섞인 도시에서, 인간은 현실적 삶과 초월적 세계 사이를 더 치열하게 탐색하게 된다. 엘 그레코의 그림은 바로 이 긴장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다.

오늘날 톨레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관광 도시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중세적 아름다움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이 도시는 인간 문명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지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단일한 정체성을 강요당할 때 문명은 닫히지만, 이질적인 사유가 부딪혀 새로운 해석의 틈을 만들 때 문명은 깊어진다. 톨레도는 바로 그 ‘틈’의 도시였다.

톨레도를 바라보는 일은 현대 도시가 잃어버린 질문을 되찾는 일과도 같다. 우리는 오늘날 다양성에 대해 말하지만, 실제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갈등을 회피하는 대신,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굴할 용기가 있는가. 톨레도의 역사는 말한다. 문명은 서로를 번역하고 해석할 때 확장되며, 도시의 힘은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톨레도는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우리는 어떤 도시, 어떤 문명을 만들 것인가. 이 오랜 도시의 층위 깊은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경청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