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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불확실성 속에서 인간의 길

by Polymathmind 2025. 12. 10.

인간은 오랫동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뉴턴의 법칙 아래에서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작동했고, 모든 현상에는 명확한 원인이 있으며, 충분한 정보만 있다면 미래 또한 계산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관찰자이자 지배자였다. 자연은 인간에게 열려 있는 책이었고, 과학은 그 책을 읽는 언어라고 믿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등장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믿음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그의 ‘불확정성 원리’는 물리학의 공식을 넘어, 인간의 인식 자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드러내는 자아비판과도 같았다.

하이젠베르크는 말했다. 어떤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수록, 그 운동량은 더 불확실해진다고. 이것은 단순한 측정의 어려움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에 포함된 한계였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고 믿지만, 사실 ‘보는 행위’ 자체가 이미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관찰자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으며, 피관찰 대상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과학의 토대를 뒤흔드는 동시에 인간의 존재 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타인을, 사회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말하지만, 그 모든 시선에는 이미 개인의 경험, 감정, 선입견이 개입되어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수식으로, 우리는 삶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 불확실성은 처음에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확실한 답, 안정적인 미래, 예측 가능한 삶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불안에 빠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불확실성 속에서 인간의 자유는 싹튼다. 만약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선택은 무의미해지고, 책임도 윤리도 사라질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세계에서는 미래는 하나의 궤도가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의 갈림길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이 때로는 실패를 낳고, 상처를 남기더라도,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증거가 된다. 불확실성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삶은 이론만큼이나 복잡하고 모순적이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독일의 우라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는 과연 핵무기 개발을 원했을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지연시켰을까? 지금도 명확한 답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삶이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이라는 질문을 우리 앞에 남겼다는 사실이다. 지식은 중립적인가? 과학은 오직 진리만을 향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언제든지 파괴의 도구가 될 수 있는가? 하이젠베르크는 위대한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불안한 시대의 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인간적이며, 더욱 사유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남는다.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고를 대신하고, 유전자 편집 기술은 생명의 경계를 흔들며, 알고리즘은 취향과 선택을 조용히 조정한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만큼 더 깊은 혼란 속에 놓였다. 세상은 점점 더 정밀해지지만, 인간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정해진다. 이 역설 속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 수 있으며,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그리고 알게 된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어쩌면 인문학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다. 확실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게 하는 일.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자로서 자연의 불확실성을 밝혔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사유의 자유를 열어 주었다. 그의 이론은 말한다. 세계는 닫혀 있지 않으며, 언제나 열려 있고, 변화하며,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리고 그 열려 있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끝내 알 수 없는가? 그 경계 위에서 인간은 비로소 겸손해지고, 동시에 위대해진다. 불확실성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유가 시작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