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그 속에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과 생활, 그리고 정신이 쌓여 형성된 문화적 유산이다.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의 제3의 도시 오사카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독특한 결을 지닌다. 교토가 제국의 정신적 수도였고, 도쿄가 근대 이후 정치·경제의 중심으로 성장했다면, 오사카는 늘 “생활과 사람”의 도시였다. 이 도시는 상업과 웃음, 그리고 다문화적 개방성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해왔다.
상인의 도시
에도 시대,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이라 불렸다.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쌀과 물자가 이곳에서 거래되었고, 유통의 중심지로서 일본 경제의 심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한 부의 축적이 아니었다. 오사카 상인들은 신뢰를 무엇보다 중시했으며, “돈은 돌고 도는 것이지만, 신용은 쌓이는 것”이라는 철학을 실천했다. 이 실용적이고도 인간적인 거래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오사카 기질’이라 불리며 도시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래서 아직도 오사카에는 '장인 정신'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기도하다. 이는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현대 경제에서도 다시금 돌아볼 만한 지혜이다
웃음과 민중 문화의 힘
오사카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웃음이다. 이 도시는 전통적으로 가부키와 분라쿠(인형극)의 무대였고, 근대 이후에는 만담과 코미디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에서 유행했던 밈 중에 오사카 출신의 사람들에게 손가락으로 총 쏘는 시늉을 하면 죽는 시늉을 한다는 것이 있다. 물론 옛날 문화이기는 하지만, 오사카 출신의 사람들의 속에 남아있는 웃음의 흔적이다. 일본 방송계에서 오사카 출신 코미디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사카 사람들의 일상 언어와 사고에는 늘 유머가 배어 있으며, 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웃음은 인간이 현실을 견디고, 또 서로를 이해하며,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문화적 장치다. 이런 점에서 오사카는 ‘웃음의 철학’을 가진 드문 도시라 할 수 있다. 오사카 출신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에도 그 문화의 힘이 담겨있기도 하다.
바다와 함께한 도시
지리적으로 오사카는 내륙 깊숙이 자리한 만을 통해 예로부터 해상 교통의 거점 역할을 했다. 이곳은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와 교류하며 다양한 문화가 들어와 뿌리내린 공간이었다. 근대화 이후에는 상업·산업도시로 빠르게 성장해 일본의 경제를 지탱하는 축이 되었고 현대에 와서도 오사카에는 코리아타운을 비롯해 여러 다문화 공동체가 존재하며, 일본 사회에서 비교적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도시로 평가받는다. 이는 더 인간적이고 생활밀착형 도시이며, 아시아와 세계 속에서 활발히 교류해온 항구도시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 냄새 나는 도시
오늘날의 오사카는 도쿄처럼 세련되고 세계화된 도시와는 다르다. 이곳은 인간적인 온기, 생활의 실용성, 그리고 웃음의 힘으로 대표된다. 상인의 신뢰 철학은 현대 사회의 냉혹한 경쟁 속에서도 인간성을 되살리는 지혜가 되고, 민중의 웃음 문화는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며, 다문화적 개방성은 미래의 도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도시는 그곳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닮는다. 오사카는 늘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온 도시였다. 그래서 오사카는 일본의 또 다른 얼굴이자, 인간적인 도시가 지닐 수 있는 가장 풍요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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