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미국에서 가장 가성비가 좋은 영화가 개봉한다. 약 20만 달러, 제목에 어스(Earth)가 들어가는데 저예산 영화다. 화려한 장면이나 특수효과가 전혀 없는 작품이다. 무대는 오직 한 교수의 집 거실이며, 영화의 전개는 대화만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단조로운 설정 속에서 영화는 인류의 역사와 종교, 철학을 아우르는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주인공 존 올드맨은 동료 교수들에게 자신이 14,000년을 살아온 크로마뇽인이라고 고백한다. 늙지 않고 세월을 건너 살아온 그는 인류사의 주요 순간들을 직접 경험했으며, 심지어 역사적·종교적 인물들과 얽혀 있었다고 주장한다.
시간과 인간의 유한성
존은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한 시대의 탄생과 몰락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는 인간과 관계를 맺고도 반드시 이별해야 했으며,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운명을 반복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시간의 무게다. 보통의 인간은 짧은 생애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며, 한정된 시간 때문에 매 순간을 귀하게 여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을 ‘덕을 실천하며 완성하는 삶’으로 규정한 것도 이 유한성 위에서다. 그러나 불멸의 존재에게는 덕과 행복조차 무의미해진다. 존의 삶은 끝없는 연속이며, 그 속에서 인간적 애착은 희미해지고 고독만이 남는다. 영화는 이를 통해 시간의 유한성이야말로 인간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본질적 조건임을 드러낸다. 죽음이 있기에 삶은 의미를 가지며, 끝이 있기에 순간은 빛난다는 역설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종교와 신화의 재해석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존이 예수의 삶과 자신을 연결짓는 듯한 발언을 하는 순간이다. 신학자 동료는 분노하며 이를 모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영화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종교적 서사가 어떻게 인간의 기억과 해석 속에서 형성되는지를 묻는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신앙의 소멸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신을 둘러싼 인간적 해석 체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의 고백은 종교적 진리가 초월적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기억과 경험에서 재구성된 것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종교는 허구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의미 체계이며, 그것이 신앙의 힘으로 현실을 지배해 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영화는 신앙의 가치를 훼손하기보다 오히려 신화와 종교를 인간학적으로 재해석할 여지를 열어준다.
역사와 진리의 불확실성
존의 고백을 뒷받침할 물증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지식과 경험담은 동료 교수들을 잠시라도 흔들리게 만든다. 이는 곧 우리가 믿는 ‘역사’의 본질을 되묻는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증거와 해석을 통해 구성된 이야기다. 미셸 푸코가 지적했듯 역사는 권력과 담론의 산물이기도 하다. 영화 속 존의 이야기는 사실일 수도,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인간이 왜 어떤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다. 존이 동료 교수들에게 남긴 혼란은 역사가 객관적 기록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해석의 산물임을 드러내며, 진리와 허구의 경계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깨닫게 한다.
'맨 프롬 어스'는 화려한 장면 없이도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을 묻는 영화다. 시간의 유한성, 종교와 신화의 본질, 역사와 진리의 불확실성이라는 세 가지 주제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불멸의 인간이라는 가상적 설정은 허구일지라도, 그 대화 속에서 우리는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삶, 믿음, 역사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 된다. 영화는 결국 “죽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온라인 플랫폼 '과학을 보다'에서 과학 덕후가 꼭 봐야하는 영화로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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