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오페라를 지방 순회공연을 하면서 질문이 생겼다.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나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지금 어두운 객석에서 귀여운 도깨비들을 보면서 음악을 듣는 저 아이들의 기억은 그들을 어떻게 만들어낼까? 그리고 어른이 된 우리는 어떤 것을 망각하며 살고 있을까? 망각은 과연 기억을 지우는 것일까?
시간 속 존재와 기억 그리고 망각
플라톤은 기억을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영혼 속 진리의 재인식으로 보았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인간이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는 첫 번째 장치이며, 순수한 감각과 감정 속에 담긴 세계관은 성인으로서의 판단과 행동의 밑거름이 된다. 반대로 니체는 망각을 삶의 능동적 힘으로 보았다. 성인이 되며 불필요하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는 행위는 정신적 균형과 창조적 에너지를 확보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어린 시절의 기억과 성인의 망각은 단순한 기억력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와 시간 속 인간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기억을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사랑과 상실, 성취와 실패 등의 경험은 나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근거가 된다. 지금 모든 순간이 기억이 되며, 그 기억이 나를 만든다. 그리고 선택을 하며, 길을 찾는다.
망각은 그저 기억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경험을 잊으며 현재와 미래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정신적 정화이다. 프로이트는 망각은 심리적 방어 기제로 인간이 가진 삶의 적응 기술이다.
사회적 연대와 문화
개인의 기억이 모이면 공동체의 기억이 된다. 가족, 마을, 학교, 지역 사회에서 공유되는 사건과 경험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사회적 기억은 축제, 전통, 언어, 예술, 기록물 등을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유대감을 확인하고, 공동체적 연대를 강화한다. 동시에 공동체의 기억은 법과 규범의 형태로 나타나 사회적 갈등과 역사적 불평등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성인이 되면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개인적 프라이버시 속에 숨어 역사적 기록과 다르게 망각된다. 이 과정에서 선택적 망각과 기억의 선택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고 사회적 가치와 윤리,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국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은 역사로 기억되고 재구성된다. 역사는 단순 기록이 아니라 미래로 안내하는 공적기억이다. 역사도 선택적으로 망각되기도 하며, 사회적 갈등과 충돌을 야기하기도 한다. 국가는 역사를 통해 기억과 망각의 균형 속에서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기억의 보존과 망각의 창조
예술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보존하고, 성인의 망각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감정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문화(회화, 문학, 영화)는 개인적 기억을 공유 가능한 형태로 변환하여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한다. 한편, 예술은 망각의 창조적 기능도 수행한다. 과거 경험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지우고, 새로운 해석과 감각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경험과 성인의 망각은 예술을 통해 동시에 재현되고 재해석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성인의 망각은 단순히 ‘기억과 잊음’의 차이가 아니다. 기억은 존재와 정체성의 근본을 형성하고, 망각은 성장과 사회적 적응을 가능하게 한다. 철학적 사유, 심리적 이해, 사회적 기록, 예술적 재현 모두 이 두 힘을 다루며 인간 존재의 복합성을 탐구한다. 결국 어린 시절의 기억과 성인의 망각은 인간 삶을 가능하게 하는 두 얼굴의 시간적 힘이며, 인간은 이 균형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삶을 지속한다.
우리는 어쩌면 기억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개인은 자신의 기억으로, 사회는 공동체의 기억으로, 그리고 국가는 역사라는 기억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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