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독일의 작곡가, 극작가, 연출가, 지휘자, 음악비평가 그리고 저술가로 19세기 유럽의 음악과 문화에 독보적인 예술가였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음악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다. 후기 바그너의 음악은 반음계를 혁신적으로 사용하며 후대 작곡가들에게 조성을 파괴하도록 견인한다. 본인 작품을 공연하기 위한 공연장을 바이로이트에 건립한다. 지금까지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리며 바그너의 작품만을 공연하는 세계적인 축제이자 철학과 전통이 공존하는 곳이 된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의 대본을 직접 쓴다. 그는 시, 시각적 요소, 음악, 연극적 표현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며, 음악은 드라마를 보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속적으로 노래하며 서사는 이어지며 기존의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대사에 음을 입힌 것)를 배제하기도 한다. 이 시도는 그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초반에 실현하기도 한다. 그는 '라이트 모티브'를 사용하여 등장인물, 장소, 감정 등을 특정한 음악을 계속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 방식은 후대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바그너는 친구였던 헤베그가 추천해 준 쇼펜하우어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읽고 쇼펜하우어의 신봉자가 된다. 쇼펜하우어의 책에는 욕망은 곧 고통이라 정의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고, 그것이 충족되면 곧 지루함이 오며 다시 욕망이 생긴다며 고통의 순환을 말한다. 결국 이 고통의 해결 방법은 예술, 금욕, 자비, 죽음 등으로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 철학은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극대화된다. 이로서 바그너는 예술이 본질을 통찰하는 방법임을 굳건히 하게 된다. 반대로 니체는 바그너를 한동안 숭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 '파르지팔' 이후에 결별한다. 이유는 무신론자였던 니체는 '파르지팔'에서 바그너의 기독교적 신앙심을 봤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바그너는 예술만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유럽 예술과 문화 그리고 철학까지 영향력이 분명 있었다. 후기 낭만의 작곡가였던 구스타프 말러는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만 있다'며 바그너를 높였다. 영화 '반지의 제왕' 작가 톨킨은 북유럽의 신화를 차용한 바그너의 작품을 즐겨 보고 듣고 연구하기도 한다. 추상미술의 아버지인 '바실리 칸딘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였다. 그의 작품을 듣고 '모든 악기에서 나의 빛깔을 보았고 야성적인 미친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며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깨달으며 추상화 쪽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맞이하기도 한다. 물론 모두 긍정적이지 않다. 바그너식 혁신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의 음악은 매우 길며, 유행에 뒤떨어진다며 반대를 하기도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주된 내용인 성배에 대한 이야기와 아서왕의 이야기는 중세 유럽의 서사문학 중 가장 많이 가공되는 이야기이다. 트리스탄의 전설은 유래를 고증하기 어렵다.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켈트권에서 흘러들어왔다는 것이다. 바그너는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트리스탄' 이야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아 오선지에 옮긴다. 이 책에서 낭만적이며 철학적인 열쇠를 찾았고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음유시인이자 기사인 트리스탄은 적국 아일랜드의 기사 모롤트와 싸움이 붙어 그를 죽이지만 독에 중독되어 이졸데에게 신분을 속이고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이졸데는 자신의 약혼자 모롤트를 죽인 자임을 알지만 끝까지 치료한다. 이후 트리스탄은 자신의 삼촌의 신붓감을 찾아 왕에게 데려가는 임무를 맡는다. 하필 신붓감이 이졸데였던 것이다. 그런데 둘은 왕에게 바칠 사랑의 묘약을 실수로 마시게 되며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된다. 왕과 이졸데는 결혼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계속된다. 둘의 관계는 발각되어 트리스탄은 부상당한 채 도망간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함께 죽음을 맞이하며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무대 위의 철학
오페라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을 수 있는 예술이다. 바그너는 이것을 '총체 예술'이라 칭하며 예술과 철학, 신화와 무의식, 사랑과 죽음으로 표현하려 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 헤겔의 사상을 음미하며 음악을 통해 철학을 구현하고자 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해방으로서의 죽음은 특히 쇼펜하우어와 맞닿는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사랑은 죽음의 영역에 속한다. 낮과 밤, 현실과 무의식의 해방은 죽음 속에서만 하나가 된다. 사랑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존재의 통합으로 해석한다.
너무 죽음을 이야기하는가? 하지만 사랑과 죽음은 같은 말이 아닐까? 사랑은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문다. 죽음도 영과 육의 해체로 경계를 해소한다. 사랑과 죽음은 나를 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한다. 릴케가 '죽음은 삶의 반쪽이며, 사랑은 그것을 완성하는 행위다'라며 사랑과 죽음을 하나로 봤다. 사랑의 증거는 죽음이며 그 죽음으로 사랑의 진실이 완성된다. 필자가 말하는 죽음이 육체의 죽음만을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우울한가? 오늘 필자가 말하는 죽음은 나를 버리는 개념으로 가져가 보면 어떨까? 내가 가진 고집, 자아, 욕망, 두려움, 소유욕 등 우리가 내려놓기 어려운 것들을 해체하는 개념이다. 나를 중심에 두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죽음이라면, 사랑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죽음은 나의 경계를 지우고, 사랑은 그 자리에 네가 들어오는 것이다. 그 때부터 내가 아닌 우리가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시신 앞에서 이렇게 노래하며 죽어간다. '트리스탄이여, 나는 그대와 하나가 되어 흘러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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