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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네덜란드 바로크, 빛을 그린 철학자

by Polymathmind 2025. 2. 24.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

1606년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태어난 렘브란트는 이탈리아 회화의 영향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유럽 미술사에서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며 소위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이끈다. 해외에서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그림은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는 초상화, 자화상, 성경 삽화를 주로 그리는데 특히 성경 삽화는 그의 성경적 지식과 특별한 구성력, 그리고 그의 철학적 성찰이 담겨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단순한 외형의 묘사보다 인물의 내면과 감정을 깊이 표현한다. 역사 그림과 성경 삽화는 극적 표현을 위해 명암 대비를 사용하는데, 카라바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카라바조는 극한의 명암을 사용한다면, 렘브란트는 부드러운 느낌이 많다. 부드러운 느낌이지만 감정의 극대화에는 부족하지 않다. 그의 붓터치(임파스토 기법)는 거칠고 강렬하며 마치 그림이 튀어나올 듯한 질감으로 표현한다. 그는 판화 작품을 많이 남기는데, 특히 에칭(동판화)을 대중적으로 발전시킨다. 그의 마지막은 불행했지만 예술적으로 더욱 깊이 있는 작품을 남긴다.

네덜란드 바로크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였다. 동인도회사의 성공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가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이로 인한 부유한 시민 계급인 '부르주아'가 왕과 귀족보다 더 재정적 여유가 많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왕과 귀족들만의 것으로 여겼던 예술 쪽에 관심을 갖게 되며 대중적 소비가 늘어나게 된다. 네덜란드는 16세기말 스페인에서 독립하며 개신교를 국교로 삼았다. 교회는 더 이상 부유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권력을 뽐낼 수 없게 된다. 그 영향으로 기독교적 그림들은 적어지고 일상적인 삶과 자연을 묘사하는 그림이 많아진다. 풍경화, 정물화, 장르화(농민,상인,가정 등), 초상화 등의 네덜란드만의 독창적인 미술 장르가 확립된다. 더 이상 예술가들은 왕과 귀족의 밑에서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게 되어 '아트 마켓' 개념이 생기게 된다. 그림을 상품처럼 누구나 거래할 수 있고, 예술가들은 긍정적인 경쟁을 하며 개성적인 예술을 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의 바로크는 시민이 주도한 황금기를 맞이하며 자유로운 예술 시장이 시작됨을 알린다. 

빛을 그린 철학자

그의 작품 중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야경'일 것이다. 원래 제목은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였다. 이 그림은 민병대 기념 초상화로 의뢰를 받았지만 렘브란트는 기존의 단체 초상화의 전통을 벗어난다. 당시의 전통은 모두 똑같은 조건으로 그려져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코크 대장을 중심에 두고 주변 인물들은 자유롭게 배치하고 그들은 모두 각기의 의미를 두며 역동적인 장면을 그렸다. 심지어 명암의 대비로 인해 어느 대원은 눈에 띄지도 않게 그렸다.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은 권력에서 배제된 것 처럼 보인다. 후원자들은 모두 비난을 쏟아냈고 렘브란트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그림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로움을 그리고 싶었다. 결국 렘브란트와 후원자들의 조화로움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후대에는 새로운 시도를 통한 갈등을 일으키며 발전을 하는 원동력을 보여준 것이라 본다.

성경 삽화 작품인 '탕자의 귀환'은 말년 작품으로 부드러운 색감과 빛으로 용서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탕자의 옷과 신발은 누더기가 되고, 듬성듬성 남은 머리카락은 그간 탕자의 고난과 뉘우침을 보여준다. 급하게 달려와 신발을 신경 못 쓴 채 무릎을 꿇은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탕자가 자신임을 느끼게 해 준다. 탕자는 결국 돌아오는 결정을 하면서 자신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아버지는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하를 얻은 듯 평안한 눈빛으로 그를 품었다. 니체는 '인간은 끊임없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고 한다. 렘브란트도 탕자와 그를 맞이하는 아버지를 그리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지 않았을까? 성경에 나온 장면을 묘사하는 것을 뛰어넘어 인물의 감정과 삶의 흔적까지 그려내려 했다. 

렘브란트는 판화(에칭)를 많이 작업한다. 에칭은 부식을 이용해 선을 새기는 방식이라 더 정교한 표현이 가능했다. 섬세한 표현 덕에 판화에서도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효과를 표현하며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판화는 제작 기간이 유화보다 짧고 원판으로 여러 장을 인쇄할 수 있기에 많은 시민들이 즐길 수 있었다. 더욱이 '아트 마켓'을 이용해 그의 판화 작품은 유럽 전역으로 퍼질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80여 점 남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63세의 자화상'은 어떤 권위도 화려함도 없다. 눈빛은 피로하고 얼굴은 거칠다. 젊은 시절 그린 자화상과는 많이 다르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처럼 삶과 죽음을 자신의 붓에 담은 철학자였다. 

63세의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