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도시, 도시의 절반은 유럽, 동쪽 절반은 아시아에 속한다. 고대 아나톨리아 문명으로 시작해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의 강국이었던 히타이트 제국, 그리고 그리스 식민도시와 로마 제국의 식민 도시로 아시아 속 유럽 문화의 특징을 갖게 된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곳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하고 제2의 로마로 선언하며 약 1,000년간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이어진다. 기독교 중심의 제국이자,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의 계승 도시었던 이곳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오스만 제국은 이곳을 지금의 이스탄불로 다시 개명하여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19세기에 서구 열강의 압력과 내부 부폐 그리고 민족주의 운동으로 오스만 제국은 사라진다. 1923년 현재의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어 수도는 앙카라로 이전하며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며 지금은 국가로 자리 잡는다.
경계와 공존
이스탄불을 처음 걷는 사람은 곧 깨닫게 된다. 이 도시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문명과 인간이 엇갈린 궤적 속에서 쌓아올린 시간의 층이다.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놓여 있고,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상징이 공존하며, 문화적으로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관통한다.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문학적 텍스트다. 인간이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도시. 이스탄불은 경계에 서서, 끝없는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도시의 종교적 얼굴이다. 하기아 소피아. 기독교 세계의 가장 위대한 성당이었고, 정복 이후에는 오스만의 대표적 모스크로, 지금은 두 전통을 모두 담은 신성한 건축물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의 신을 향한 믿음이 어떻게 서로 다른 언어와 형식으로 구현되었는지를 목도하게 된다. 기독교의 돔 위로 아랍어로 쓰인 꾸란의 구절이 겹쳐지고, 이콘과 미흐라브가 나란히 공존하는 모습은 단순히 종교 간의 타협이 아니라, 인간의 영성이 어떻게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이어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충돌이자 변형이며, 동시에 공존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공존은 이스탄불의 본질인 ‘경계성’에서 비롯된다. 이 도시는 언제나 양쪽에 발을 디딘 존재였다. 로마와 페르시아, 비잔틴과 이슬람,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이스탄불은 단 한 번도 고정된 정체성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약점이 아닌 힘이었다.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았기에, 이 도시는 수많은 타자들을 품어왔고, 낯선 것들을 익숙하게 만들었다. 동서양의 경계에서 자라난 문화는 혼합되고, 전통은 재창조된다. 이스탄불은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만이 아니며, 동시에 수많은 타자들의 흔적이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결국 인간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이 도시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시간과 공간, 타자들이 내 안에 축적된 존재라고.
이스탄불이 특히 인문학적으로 특별한 이유는, 이 도시의 시간 개념에 있다. 대부분의 도시가 과거는 과거로, 현재는 현재로 분리되어 흐른다면, 이스탄불은 마치 고고학적 지층처럼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오스만 시대의 분수대 옆에 비잔틴 제국의 교회 유적이 있고, 그 옆으로 현대식 전철이 지나간다. 시간은 이곳에서 직선이 아니라 나선이다. 과거는 단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으며, 미래는 과거 위에 덧씌워진 가능성이다. 도시의 벽돌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일상 속에 시간은 켜켜이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이스탄불은 단지 한 국가의 수도나 관광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과 문명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하나의 거대한 장(field)이다. 종교가 충돌하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지, 정체성이 흔들리면서도 풍부해질 수 있는지,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현재 속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는지를 우리는 이 도시를 통해 배운다. 이스탄불은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은유다. 언제나 경계에 서 있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오히려 그 경계성 덕분에 유연하고 살아 있는.
이 도시는 우리에게 말한다. 경계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타자와의 공존은 파괴가 아니라 변형이며, 시간이란 앞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돌아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이스탄불은 인간 존재가 지닌 가장 깊은 질문들(신, 정체성, 시간)을 한 몸에 품고 있으며, 그래서 이 도시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인문학의 살아 있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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