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코드
2006년, 유명한 톰 행크스 주연의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개봉한다. 원작은 2003년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이다. 영화가 개봉한 후, 전 세계적으로 많은 논란과 화제를 일으켰다. 대부분이 종교적 논란이었다. 영화에는 다양한 음모론이 등장하는데 그럴싸한 근거가 있고, 실존하는 장소와 사물들 그리고 작품들로 몰입감이 더해져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영화 제목으로 다 빈치가 사용되어 '최후의 만찬'을 중심으로 예수의 결혼설과 그림에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 그리고 그 후손을 지키는 시온 수도회까지 정말 대단한 상상력을 펼쳐냈다. 영화는 영화일 뿐...
2023년에 프랑스 파리에 두 달간 머물렀다. 파리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떠나기 전날 겨우 온종일 시간을 냈다. 파리까지 왔으니 루브르 박물관을 가야 할 것 같았다. '다빈치 코드'를 좋았했던 터라 나도 뭔가 발견할 것이 있을까? 싶었다. 유리 피라미드를 지나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는 기분은 마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바닥, 벽, 천장의 모든 선과 곡선들은 이미 나를 압도했다. 전날 인터넷을 뒤져가며 무엇을 봐야 하는지, 어떤 순서대로 봐야 하는지 벼락치기를 하며 종이에 적어 들어섰지만 준비한 종이는 어느 순간 내 손에서 없어졌다. 순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보고 느끼고 압도당하고 겸손해지고 또 겸손해진다. 그래도 입장시간 1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모나리자는 조금 편하게 봤다. 아주 작은 그림. 테러 때문에 방어선과 보안시설 때문에 모나리자의 숨결은 느낄 수 없었다. 그 작은 그림에 파리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있다. 그곳을 벗어나면 '성모 마리아의 영면'이라는 카라바조의 그림이 있다.
앞의 글 중, 카라바조의 글이 있어 그의 대한 이야기는 조금 생략하고, 이 그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카라바조의 비밀
영화 '다빈치 코드'의 내용과 결을 같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카라바조가 추구했던 예술의 목표가 이 그림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장면은 당시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과 동일하게 표현을 했으며, 주변의 다른 보통 인간들과 비슷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일은 성모 마리아의 모델이 길거리에서 매춘을 하는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로마 테베레 강에 투신한 매춘부 그것도 임신을 하여 자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여인을 모델로 그렸다는 것이다. 카라바조는 이 익사체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오른손이 배 위에 올라와 있는데, 임신을 나타냈으리라. 카라바조는 원근법과 해부학을 통해 사물과 인간의 실제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극사실주의 화가였으니. 그는 왜 이렇게 논란이 되는 그림을 그렸을까? 그의 인생은 이미 논란 그 자체였다. 괴팍한 성격에 살인까지 저지르며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그는 길거리의 사람들, 그저 살아내는 것에 이골이 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들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기도, 그들의 삶이 저 위에 고귀한 사람들의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으리라. 고통스러운 도망자 신세를 현실로만 본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저 하나의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신에게 부여받은 삶이란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나의 책임이다. 그것을 다른 인간이 평가할 수 없다. 이 세상을 잘 살아내고 신 앞에 서는 순간, 신이 심판하리라. 카라바조는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나 위로 올라가는가 보다는... 누군가 카라바조에게 '당신의 천재적 예술성은 어디서 끌어내는가?' 물어봤다. 그는 길거리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나의 영감은 바로 저 거리를 지나다니는 가난하고 평범하고, 속된 사람들이라오'라고 외쳤다.
그는 그들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냈다. 그의 창조력은 고통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최악의 상황에서 꿈(희망)을 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고통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 고통 이후에 성장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창조는 단순한 재미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통이나 역경에 묵묵히 견딘다면 그 가운데 새로운 창조의 힘이 생긴다.
비바람이 불 때, 두 팔을 벌려보라. 춥고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견고함이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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