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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교만- 죄일까? 시선, 힘

by Polymathmind 2025. 4. 18.

교만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다. 이 질문 속에는 자신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에 대한 욕망도 함께 담겨 있다. 그 욕망이 때로는 자긍심이 되고, 때로는 교만이 된다. 교만은 단순히 잘난 체하는 태도일까?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를 확장하려는 본성의 표현일까? 그 복잡한 구조를 해체하며 질문을 던진다. 교만은 악인가, 아니면 인간됨의 또 다른 방식인가?

죄일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허브리스(hybris)’, 즉 지나친 자부심과 오만함을 신들이 가장 혐오하는 죄악으로 보았다. 인간이 자신의 자리를 잊고 신의 영역에 도전할 때, 비극은 시작된다. 오이디푸스, 크레온, 프로메테우스… 이들은 모두 인간의 한계를 넘으려다 벌을 받는다. 교만은 ‘질서를 거스르는 자의 불손’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모든 자기 긍정이 교만은 아니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힘이며, 철학자 니체는 이런 자긍심을 통해 인간이 ‘종속의 도덕’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선한 인간’이란 단순히 겸손하고 희생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힘을 긍정하고 의지를 창조로 이끄는 자라고 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나를 믿는가, 아니면 너보다 우월하다고 믿는가? 교만과 자존감은 같은 뿌리에서 자라지만, 그 가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시선

교만은 자기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타인의 시선 안에서 자라난다. 내가 나를 ‘위대하다’고 느끼는 순간, 사실은 ‘타인의 기준에서 내가 높다’고 여기는 것이기도 하다. 사르트르는 이를 ‘타자의 응시’라고 불렀다. 내가 누군가 앞에서 교만해지는 이유는, 그 앞에서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즉, 교만은 진정한 자기 확신이 아니다. 교만은 오히려 불안한 자기 자신을 타인의 평가 위에 올려두는 시도다. 타자의 인정 없이는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아. 그 자아는 타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그 시선에 맞춰 나를 과장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신감은 교만이 아니다. 진정한 자신감은 ‘나를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 오히려 겸손과 닮아 있다. 

긍정적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은 언제나 금기시되어야만 할까? 인간은 신의 질서를 넘보았고, 그 덕분에 불을 훔쳤으며, 하늘을 날았고, 별에 도달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으로부터 불을 훔친 죄로 벌을 받았지만, 그는 동시에 인간 문명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의 과학과 철학, 예술의 혁신은 모두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던지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에 대한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틴 루터도 가톨릭의 따가운 시선에서는 교만하게 보였지만 신앙의 자율성을 얻었고, 프랑스혁명의 주인공이었던 제3계급의 평민들은 왕과 귀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교만함으로 권리와 평등, 자유를 얻어낸다. 그 의문이 때론 교만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한계를 넘으려는 용기였다. 우리는 묻는다. 교만 없는 진보는 가능한가? 어쩌면 교만은 문명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앞에 이야기했듯 교만은 자신감의 결여에서 온다. 우리가 교만할 수 있을 때는 자신에게 확신이 있어야 하며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여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교만이며 나약한 자들이 보며 괴로워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건, 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교만은 그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해석일 뿐, 진정성을 가지고 행동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의도가 분명하다면, 그것을 타인이 어떻게 보던지 상관없다. 그때 교만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 해석될 수 있는 자신감으로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