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우리는 '게으름'이라는 말을 들을 때, 종종 죄책감이나 무능, 혹은 패배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게으름은 부지런함의 반대말이며,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상태, 혹은 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인식된다. 하지만 과연 게으름은 단순히 나쁜 것인가? 철학은 이 질문을 단순하게 넘기지 않는다. 오히려 게으름을 통해 우리는 인간 존재의 조건, 시간과 사회의 권력 구조, 그리고 욕망의 본질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
죄일까?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게으름은 주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다. 중세 기독교는 ‘나태’를 7대 죄악 중 하나로 분류하며, 노동을 신과의 계약으로 간주했다. 신의 창조 질서를 따르기 위해 인간은 쉬지 않고 일해야 했고, 이 전통은 근대 자본주의 윤리로 이행되며 ‘성실’과 ‘근면’이라는 도덕적 기준을 낳았다. 게으름은 곧 타락이며, 의무의 포기였다. 하지만 이런 도식에 균열을 낸 철학자들도 있다. 에피쿠로스는 삶의 목적이 고통의 회피와 평온함에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삶은 끊임없는 활동이 아닌, 내면의 평정이 중요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행복’을 최고의 선이라 말했으며, 그것은 반드시 ‘분주함’을 통해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게으름이 정말로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일까? 의미 없는 '분주함'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원동력이 될까? 그렇다면 계속 게을러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맞는가?
시간
게으름은 시간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리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시간을 자각하는 존재’로 정의하며,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앞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시간은 더 이상 존재의 토대가 아니라, 거래 가능한 자원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하루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보냈는지를 기준으로 삶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이런 구조 안에서 게으름은 흐름에 대한 거부다. 우리는 어떤 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다시 발견한다. 무위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일어나는 사유의 출발점이다. 게으름은 그 자체로 시간을 다시 느끼고, 스스로의 리듬을 회복하는 행위다. 생산성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시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시간이다.
저항
게으름은 때때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큰 목소리일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생산성과 유용성을 요구한다. 성과 없는 시간은 낭비이고, 성장이 없는 존재는 퇴보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인간을 수단화하며,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묻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도 생성하려는 힘이라 보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거부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하지 않겠다’는 선택만으로도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된 노동에서 벗어나는 가장 조용한 방식, 그것이 바로 게으름이다. 누구도 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사회의 시선을 비껴가며, 우리는 자신을 다시 호명할 수 있다. 게으름은 패배가 아니라, 저항이며 회복이다.
게으름은 무력함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스스로에게 되돌아가는 길이며, 시간과 사회에 대해 던지는 철학적 질문이다. 게으름을 통해 우리는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사는 것’이 아닌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된다. 어쩌면 게으름은, 우리 모두가 너무도 오랫동안 외면해온 자유일지 모른다.
책임을 회피하고,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것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게으름은 분명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 하지만, 모든 게으름을 동일시 죄악시한다면, 각자의 쉼과, 고요함, 침묵까지 같은 잣대로 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가끔은 게으름도 삶에서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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