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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인문학 25 - 스페인 톨레도, 경청의 도시 스페인의 중심부, 타호 강이 크게 굽이치는 지점 위에 톨레도가 자리한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거석처럼 솟아 있고, 그 위에 성벽과 궁전, 성당과 회당, 시장과 광장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톨레도를 마주하는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이 도시의 ‘밀도’다. 단순한 공간의 밀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명이 중첩된 시간의 밀도이다. 이곳에서는 과거가 퇴적되어 납작해진 것이 아니라, 층층이 살아 있으며, 서로 겹쳐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톨레도의 독특함은 중세 시기, 기독교·이슬람·유대교가 한 도시 안에서 의도치 않게 공존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구축되었다. 흔히 말하는 ‘세 문화의 도시’라는 단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11세기부터 15세기 무렵까지 톨레도는 세 종교가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2025. 12. 13.
OTT 시대, 영화와 오페라의 갈림길 얼마 전, 뉴스에서 넷플릭스(OTT)에서 워너 브라더스(영화사)를 매입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물론 최종 확정은 아니며, 주주 승인과 규제 당국의 심사가 남았다. 거래 가치는 827억 달러로 평가되며 거대한 거래로 기대가 된다. 영화계는 OTT의 영향을 이미 받고 있는 상황이며 영화 관계자들은 많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OTT 플랫폼이 일상화된 지금, 영화 산업은 더 이상 극장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관객은 집에서 고해상도 화면과 적정 수준의 음향으로 대부분의 영화를 소비하고, 이는 영화의 제작 방식부터 배급, 소비까지 모든 시스템을 뒤흔들었다. 오페라 연출가로서 이런 질문을 하게된다. 영화관을 가지 않는 관객들이 공연예술을 보러 극장으로 올까? 흥미로운 점은 이 거대한 변화가 공연예술 산업에도 직접.. 2025. 12. 12.
우리가 잃어버린 것 17 - 느림 많이 바쁠때는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든다. 막상 하루이틀 쉬게되면 모두 분주하게 살고 있는데, 나만 멈춰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가끔 바쁘게 살았던 사람들이 전혀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걱정스럽기도 하다.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호흡, 생각, 그리고 존재는 느릴 때 시작되지 않을까?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빠름을 미덕으로 삼는다. 더 빠르게 생각하고, 더 빠르게 판단하며, 더 빠르게 성취하는 것이 곧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속도는 과연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고 있을까? 인문학적으로 ‘느림’은 단순한 생활 방식의 선택이 아니라, 존재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존재를 다.. 2025. 12. 11.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불확실성 속에서 인간의 길 인간은 오랫동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뉴턴의 법칙 아래에서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작동했고, 모든 현상에는 명확한 원인이 있으며, 충분한 정보만 있다면 미래 또한 계산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관찰자이자 지배자였다. 자연은 인간에게 열려 있는 책이었고, 과학은 그 책을 읽는 언어라고 믿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등장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믿음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그의 ‘불확정성 원리’는 물리학의 공식을 넘어, 인간의 인식 자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드러내는 자아비판과도 같았다.하이젠베르크는 말했다. 어떤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수록, 그 운동량은 더 불확실해진다고. 이것은 단순한 측정의 어려움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에 포함된 한계였다. 우리는 세계를.. 2025. 12. 10.
인상주의와 고전주의 사이에서 - 에드가 드가, 인간을 해체한 사람 에드가 드가는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의 작품 소재도 발레 무용수와 경주마가 많은 이유가 그렇다. 파리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갑자기 국립미술학교로 입학한다.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며 그림을 익혔고, 1년 간 이탈리아 여행에서 거장들의 숨결을 느낀다.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 뉴 올리언스에 방문하며 새로운 역동성을 경험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한다. 말년엔 눈병이 심해져 그림보다 조각에 집중하기도 한다.에드가 드가는 오늘날 흔히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지만, 정작 그는 이 명칭을 끝까지 거부했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와 같은 화가들과 같은 범주 안에 묶이는 것을 불편해했고, 심지어 “나는 인상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기도 했다. 이 단순.. 2025. 12. 9.
오페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 - 아스트로 피아졸라, 탱고 오페라 지난 주, 한국에서 초연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를 보고 왔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였던 그는, 탱고 5중주단 '킨테토 누에보 탱고'를 결성하고 아르헨티나의 탱고 시대를 열었고, 탱고의 혁명가로 불린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는 반도네온을 선물하며 탱고를 익히라 권유받았지만, 뉴욕에 살면서 피아노와 클래식에 더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결국 탱고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피아졸라에게 클래식 작곡을 가르쳤던 선생님은 그에게 '너의 음악 안에 탱고가 있다'며 말할 정도로 그의 핏줄에는 탱고가 가득했다. 그 이후, 탱고를 부수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며 '탱고 누에보(새로운 탱고)'를 만든다. 보수적인 탱고인들은 그를 탱고를 죽인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그는 죽인 것이.. 2025. 1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