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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영화 '조커'(2019)- 한 인간의 몰락과 사회의 거울

by Polymathmind 2025. 7. 16.

존재의 이유를 묻는 철학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세상에서 철저히 소외된 존재이다. 그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사회는 그에게 살아갈 이유조차 주지 않는다. 정신병력과 감정 장애를 가진 그는 끊임없이 조롱당하고, 학대받으며, 무시당하며, 이 고통은 그에게 “내 존재는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만든다.

이러한 아서의 내면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니힐리즘(nihilism)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니체는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시대에 인간이 목적 없이 방황하게 된다고 보았으며, 그 공허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서는 그러한 창조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무너진 가치 속에서 절망과 분노를 선택하게되고, 결국 그는 ‘조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폭력적으로 각인시키려 한다. 이 정체성은 의미 없는 세계에 던진, 조롱의 웃음이며 절망의 반역이다.

사회가 만든 괴물 

조커는 악당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의 실패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영화 속 고담시는 현대 도시의 불평등, 빈곤, 계층 간 갈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서는 정신과 치료조차 중단되는 복지 예산 삭감 속에서 버려진 존재이며, “너 같은 사람은 신경 쓰는 이가 없다”는 말은 단지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 고담 시민들 대부분은 고통받고 있으며, 분노와 무관심 속에 서로를 외면한다.

아서가 폭력을 저지른 이후 사람들은 그를 '혁명'의 상징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조커는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억압된 대중의 분노가 투사된 아이콘이 되고, 이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권력과 억압의 작동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사회는 비정상을 통제하려 하며, 그 과정에서 더 큰 폭력을 낳으며, 결국 조커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 부재가 만들어낸 하나의 증상(symptom)이라 할 수 있다.

광기의 미학과 시선의 윤리

'조커'는 조커라는 인물을 단순한 악의 화신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내면의 파괴 과정을 예술적으로 연출함으로써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특히 조커가 완전히 각성하여 계단을 내려오며 춤을 추는 장면은, 폭력의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아름답게’ 표현된다. 그의 붉은 수트, 음악, 조명, 몸짓 하나하나가 시각적 쾌감을 자극하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변신에 미학적 동의를 하게 만든다.

여기서 인문학적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왜 조커의 광기와 폭력에 매혹당하는가? 미학은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는 ‘아름다움’이 도덕과 윤리를 넘을 수 있는가라는 고전적인 미학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영화는 우리가 ‘악’에 대해 갖는 감정과 태도를 시험하며, 그 경계선을 흐려놓는다.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게 만들며, 결국 관객 스스로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조커는 우리 자신이다

'조커'는 단지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외면했던 사회적 문제들, 무관심, 불평등, 고독, 그리고 인간의 본성까지 비추는 거울이다. 아서 플렉은 낯선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세계 속에서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단순히 "조커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