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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후기 낭만 음악가 - 후고 볼프, 침묵과 폭발 사이

by Polymathmind 2025. 11. 19.

우리는 종종 예술가의 삶을 극단의 파동으로 기억한다. 조용한 침묵 뒤에 찾아오는 폭발, 무기력의 계절 뒤에 불시착하듯 도래하는 창작의 시간. 후고 볼프의 생애는 그 극단의 리듬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의 가곡은 짧지만 밀도가 높고, 작지만 세계 전체의 정서를 압축한 듯하다. 필자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볼프의 가곡을 처음 접했을 때를 기억해보면,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다. 이해하지 못하는 화음과 곡의 구성때문이었다. 담당 지도교수는 나에게 볼프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의 작품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정신이 어떻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어떻게 음악으로 변환되었는지를, 존재의 깊이를 들여다보듯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의지의 폭발

볼프의 창작 패턴은 일종의 ‘지진’과 같았다. 몇 주 만에 수십 곡을 써내려가다가도, 창작이 멈추면 돌연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불연속적인 폭발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세계-의지’의 발현과 닮아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은 고통의 세계를 잠시 멈추는 관조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예술가란 그 의지의 흐름을 매개하는 존재다. 볼프는 그 의지의 파도를 통제하기보다 그에 휩쓸리는 예술가였다. 그는 영감이 밀려올 때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힘을 막을 수 없다”고 기록했다. 그 힘은 개인적 감정의 수준이 아니라, 세계의 고통과 아름다움이 한꺼번에 그의 내면을 향해 균열을 내는 경험이었다. 창작이 멈춘 순간은 단순한 ‘영감의 부재’가 아니라, 세계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감각, 존재가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그의 예술은 세계와 자아 사이에서 발생하는 존재론적 파열에 대한 응답이었다.

말의 그림자를 음악으로 해석하다

볼프는 가곡 작곡가였지만, 그가 집착한 것은 멜로디가 아니라 언어의 본질이었다. 그는 시의 억양과 숨결, 단어 하나에 숨어 있는 미세한 진동을 포착해 음악으로 변환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말(Sprach,言語)은 존재의 집”이라면 볼프는 그 집의 창문을 음악으로 열어젖힌 자였다. 그에게 음악은 시를 장식하거나 해석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가 말하지 못한 것, 언어의 틈에 남겨진 감정의 음영을 음악이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시와 음악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존재의 깊이를 탐구하는, 일종의 언어적-존재론적 대화가 그의 가곡 속에서 일어난다. 볼프의 가곡에서 피아노 반주는 단순한 동반이 아니라, 시의 무의식이 흘러나오는 통로다. 그래서 그의 곡을 듣고 있으면, 마치 언어가 말하기 이전의 세계를 엿보는 듯한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균열의 미학

볼프의 음악과 삶은 니체가 제시한 아폴론적(형식·질서)과 디오니소스적(혼돈·광기) 힘의 충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구조적이고 섬세하다. 시의 의미를 해석하는 화성의 전환, 감정의 높낮이를 정교하게 반영하는 음악적 장치들, 이 모든 것은 아폴론적 예술가의 작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형식을 떠받치는 그의 정신은 디오니소스적 폭발과도 같았다. 극도로 예민한 감수성, 통제되지 않는 감정, 그리고 매독으로 인한 정신 붕괴는 그의 창작 충동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볼프의 예술은 바로 이 두 힘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태어난다.
아폴론의 질서 속에서 디오니소스가 울부짖는 음악. 그의 가곡을 듣는 경험이 강렬한 이유는 바로 이 내적 긴장이 그대로 음악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파괴가 아닌 준비의 시간

볼프의 침묵은 단순한 창작 부진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이 발화되기 전, 존재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다. 그는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느끼며 극단적인 자기 혐오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침묵이 있었기에, 그의 음악은 더욱 깊어졌다.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잠복의 시간, 창작을 향한 내면의 그릇을 다시 구축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볼프에게 예술은 흐름이 아니라 파동이었다. 침묵과 폭발이 번갈아 찾아오는 리듬 속에서 그는 세계를 받아들이고, 다시 그것을 음악으로 토해냈다.

볼프의 질문: 예술은 어디에서 오는가?

후고 볼프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한 가지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예술은 인간의 정신이 흔들릴 때 태어나는가, 아니면 그 흔들림을 견디려는 몸부림에서 태어나는가?

볼프는 불안정한 정신 때문에 위대한 예술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는 그 불안정성을 견디기 위해 예술을 선택했다. 그에게 음악은 존재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는 마지막 언어였고, 시의 빈틈을 메우는 울음이자 고백이었다. 그의 가곡은 짧지만, 그 안에는 한 인간이 세계와 싸우며 남긴 깊은 흔적이 있다. 침묵과 폭발, 질서와 광기, 언어와 음악의 경계에서, 볼프는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세계의 진동을 음악이라는 형태로 붙잡아두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듣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의 내면이 조용히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볼프는 결국, 존재의 미세한 균열을 가곡 속에 기록한 가장 예민한 청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