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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확신을 의심한 과학자 - 이론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by Polymathmind 2025. 11. 5.

1918년 뉴욕에서 태어난 '파인만'은 10대 부터 물리학과 기계에 재능을 보였다. 동네에서 라디오 고치는 소년으로 이름을 날렸고, 자신의 집에 강도 경보 시스템을 만들기도 한다. 15세 때는 스스로 고안한 수학 기호들을 사용하여 함수, 대수, 기하학등을 풀어냈다고 한다. MIT에서 수학을 입학했지만, 전기 공학을 거쳐 물리학으로 졸업하고, 24세에 프린스턴 대학교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 후, 맨해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계획)에 합류하여 연구한다. 이후, 코넬 대학교와 칼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재직한다.

리처드 파인만은 20세기 과학을 상징하는 이름이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물리학의 공식이 아니라 '의심하는 태도'였다. 그는 “과학은 확신이 아니라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곤 했다. 과학은 진리를 증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틀릴 가능성을 기꺼이 인정하는 인간의 겸손함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파인만의 세계관에서 ‘모른다’는 말은 무지가 아니라 탐구의 출발점이다. 그는 “나는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오히려 그 무지가 인간의 지적 자유를 보장한다고 믿었다. 완벽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순간, 사고는 닫히고 진리는 멈춘다. 반대로 의심은 사고를 계속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그에게 과학이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의심의 지속'이었다.

그의 대표적 업적인 양자전기역학(QED)은 자연의 가장 미세한 수준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수학적으로 설명한 이론이다. 하지만 그 복잡한 이론을 세상에 설명하는 그의 방식은 놀랍도록 인간적이었다. 파인만은 수식보다 그림으로, 원리보다 직관으로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과학을 신비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은 아름답기 때문에, 그 복잡함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과학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겸허하게 배우는 태도였다. 

파인만은 당시 과학으로 증명된 것을 쉽게 맹신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전문가의 무지를 믿는 것이 과학”이라고 말하며, 지식이 교조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는 과학의 방법론을 넘어, 인간의 사유 방식에 대한 철학적 선언이었다. 우리가 신념을 의심하지 않을 때, 그것은 이미 사유의 종말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의심은 회의주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고의 증거였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생각. 파인만은 우주를 고립된 입자들의 집합으로 보지 않았다. 전자, 빛, 물질, 인간 모두가 끊임없이 얽히고 영향을 주는 하나의 유기적 흐름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는 과학의 언어로 표현된 존재론이자, 관계의 철학이었다.

파인만은 봉고 드럼을 연주했고, 미술을 사랑했으며, 마야 문자 해독, 춤추기, 금고 따기등 인생을 실험처럼 즐겼다. 그는 학문과 예술, 이성과 감성을 분리하지 않았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결국 세계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의 강의에는 언제나 유머와 호기심이 함께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지 말고, 세상이 얼마나 흥미로운지를 알기 위해 공부하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동료 물리학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하기도 한다. 그는 또하나의 폴리매스 인간이었다. 

그의 철학은 오늘날 인류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를 대신하는 시대에도, 파인만이 강조한 의심의 정신은 여전히 가장 인간적인 가치로 남아 있다. 의심은 불완전한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자,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파인만은 생의 마지막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그 모든 철학을 압축한다.
“나는 두 번 죽고 싶지 않아. 지금도 충분히 지루하거든.” 죽음조차도 그에게는 ‘경험할 가치가 있는 실험’이었다.

리처드 파인만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확신 속에 안주하는가, 아니면 의심 속에서 성장하는가.
그의 대답은 분명하다.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거기서부터 진짜 앎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