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클로드 모네는 어린 시절 노르망디 르아브르에서 화가 외젠 부댕을 만나 그림을 배운다.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로 용킨트를 알게되면서 공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기법을 배우며 그림의 방향을 잡았다. 그는 일본 풍속화인 '우키요에'에 관심을 가졌고 그 문화에 잔뜩 빠졌다. 집안과 정원을 일본풍으로 꾸밀 정도였으니 말이다.

모네의 그림을 마주할 때, 우리는 한 장면이 아니라 하나의 순간을 본다. 그 순간은 고정되지 않는다. 바람이 지나가고, 구름이 흘러가며, 햇빛이 바뀌는 찰나의 시간 속에서 모네는 세계를 붙잡는다. 그러나 그가 포착하려 한 것은 단순히 자연의 외형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 즉 ‘본다는 것’ 자체를 그리려 했다. 뚜렷한 선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분산되는 불분명한 경계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그 이유는 19세기 말, 사진기의 등장이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사진이 현실을 정확히 복제할 수 있게 되자, 회화는 더 이상 ‘사실적인 재현’의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모네의 혁신이 시작된다. 그는 현실을 정확히 묘사하는 대신, 눈에 들어오는 ‘빛의 인상’을 그렸다. 그것이 그의 대표작 '인상, 해돋이'의 제목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인상(Impression)’은 곧 지각의 순간성을 의미한다. 대상이 아닌 지각하는 나, 즉 의식의 흔들림이 모네의 캔버스 위에서 빛과 색으로 변환된다. 모네는 바로 그 ‘살아 있는 관계’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루앙 대성당 연작을 보면, 그는 같은 대상을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대에 반복적으로 그렸다. 정오의 강렬한 햇살, 저녁의 금빛 노을, 흐린 날의 회색빛 변하지만, 대성당은 변하지 않지만 빛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것은 곧 시간이 곧 색이며, 빛이 곧 존재의 본질이라는 모네의 철학이었다.
그의 후기작 '수련' 시리즈에 이르면, 그 철학은 더욱 깊어진다. 수련은 구체적인 형태를 잃고, 화면은 거의 추상에 가까운 색의 파동으로 변한다. 우리는 더 이상 ‘수련’을 보지 않는다. 대신 빛과 시간의 흔적,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보고 있는 행위’를 경험하게 된다.

모네는 노년에 시력을 잃어가며 점점 세계를 희미하게 보았지만, 오히려 그 흐릿한 시선 속에서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존재의 기운’을 포착했다. 그는 한동안 외부의 세계를 그리지 않았다. 나중에 선글라스 렌즈로 장애가 개선된다. 그 후에 수정한 그림에는 파란 색조가 강해진다. 그는 더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다. 그가 그린 것은 자신의 눈, 자신의 시간, 자신의 의식이었다.
모네의 회화는 결국 묻는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세계를 느끼는 나 자신을 보는 것인가?”
그의 대답은 아마 이렇게 들릴 것이다.
“나는 사물을 보지 않는다. 나는 그 사이를 흐르는 빛을 본다.”
그에게 자연은 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시간과 존재가 만나 생겨나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그래서 모네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시간이 스며드는 순간의 노래, 즉 “살아 있는 세계의 호흡”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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