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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우리가 잃어버린 것 16 - 질문

by Polymathmind 2025. 12. 3.

필자는 질문하는 것을 즐겨한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도 질문을 많이 던진다. 그 질문이 수업에 관련이 없어도 말이다. 그리고 늘 질문하라고 한다.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라도 모두 알 수 없다. 모르는 질문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러면 잠깐을 외치고 핸드폰을 열어 검색을 한다. 답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른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누구나 언제든지 모르면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한다. 사실 지금 우리는 전보다 더 많은 질문을 가지고 살고 있다. 모든 분야의 발전 속도는 굉장히 빨라졌다. 어떤 전공을 했던, 어느 분야의 전문인이건 모두 알 수 없다. 그래서 AI의 힘을 빌려 정보를 빠르고 쉽게 얻어내려는 기술은 시작되었고, 이미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저 멀리 달려나갔다. 결국 우리는 질문을 많이 하게되고 답을 얻는 속도도 빨라졌다. 

양적으로 많아진 질문에 빠르게 답을 얻어내는 것은 인간에게 참 유익하다. 효율성과 시간 절약은 물론이고, 학습과 지식 확장 그리고 협업과 의사소통에 큰 이점이 있다. 정보의 방대함은 인간의 뇌 용량을 넘어섰고, 새로운 기술과 과학에는 속도와 정확도가 중요하다. 답은 쏟아지지만 '나는 왜 이 질문을 하고 있는가?'를 놓치게 된다. 생각하기 전에 답을 얻으니 질문은 더 간단해지고 가벼워지게 된다. 나는 무엇이 궁금한지, 무엇을 갈망하는지의 질문이 빠졌단 말이다. 

하지만 질적인 면은 어떨까? 정보와 지식의 관한 질문을 제외한다면, 인간은 어떤 질문을 하게될까? 지식과 정보에 파묻혀 본질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이 질문들의 답도 AI가 주는 답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필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빠른 답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집중력 그리고 인내심을 저하시킨다. 본질에 대한 질문의 답은 쉽게 얻을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메모에 이렇게 적어놨다. '가장 좋은 답은 가장 좋은 질문이다.' 이 말은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도 끊임없이 질문만 했다. 왜냐하면 답은 멈추게 하지만, 질문은 계속 걷고 뛰게 만들기 때문이다. 답은 어떤 순간을 '끝났다'라고 만들지만, 질문은 그 순간을 '시작'으로 만든다. 인간은 지금까지 완벽한 답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으로 움직였다. 그 질문에 과학, 철학, 그리고 예술이 만들어졌다. 만약 이 답들이 빠르게 쉽게 주어졌다면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현대는 답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하지만 질문이 부족한 시대이기도 하다. 질문하기 보다는 답을 구하는데 익숙해져있다. 지금의 교육이 그렇다. 답을 고르는 전문인을 만들어 부품으로 쓴다. 이젠 그 부품은 필요없다. 그 부품은 AI가 모두 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운용자가 필요하다. 즉,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답을 얻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질문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질 높은 질문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또 질문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자들과 과학자 그리고 예술가들에게 질문해야한다. 그 질문의 끝엔 '나는 누구인가?' , '어디로 가는가?' , '무엇을 남기려는가?'의 질문을 만날 것이다. 이 질문들은 나의 우매함에서 시작되었고, 나의 고통으로 끝날 것이다. 어차피 삶이란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점점 더 좋은 질문을 갖게 되는 과정일지 모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