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한다. 필자가 중학교 시절, 아버지께서 꼭 봐야하는 영화라며 가족이 모두 보자고 하셨다. 아마 그때 영화관이란 곳을 처음 간 것 같다. 첫 영화관 관람은 나에게 엄청난 각인으로 남았다. 가족과의 관람, 그리고 충격적인 장면들은 사실 중학생인 필자에겐 그러했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 '쉰들러의 방주'를 영화로 제작한다. 영화음악의 대가 존 윌리엄스는 영화의 깊이를 더해준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전쟁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 도덕, 그리고 기억에 대한 질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어둠 속, 한 사람의 선택이 수천 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적 일화가 아니라 인간성의 가능성을 증언하는 이야기다. 스필버그는 카메라를 통해 폭력의 시대를 기록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어떻게 다시 인간으로 회복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는 처음부터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냉철한 사업가이자 나치당원이었으며, 전쟁을 이용해 돈을 벌고자 했다. 그러나 크라쿠프의 게토와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학살을 목격하면서 그는 변하기 시작한다. 유대인 노동자들을 값싼 인력으로 보던 시선이, 하나의 ‘생명’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쉰들러의 선택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성이 드러난다.
이에 대비되는 인물이 수용소의 지휘관 아몬 괴트다. 그는 폭력을 일상처럼 행사하며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는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바로 그에게서 드러난다. 괴트는 괴물이 아니라, 체제에 순응한 평범한 인간이다. 그의 무감각은 특정 개인의 광기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낸 악이다. 스필버그는 이 대비를 통해 묻는다.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으며, 또 어디까지 구원될 수 있는가.
영화의 대부분은 흑백으로 촬영되었지만, 다섯 장면만은 유일하게 색을 가진다. 초반에 나오는 유대교 예배, 후반에 쉰들러 묘소 참배, 쉰들러가 안식일에 예배를 허락하는 장면의 촛불, 그리고 대표적인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의 생존과 죽음 장면이다. 빨간 코트의 소녀는 어린 생명의 상징이자, 기억해야 할 역사의 표식이다. 쉰들러가 그녀의 시신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 ‘기억의 의무’를 느낀다. 흑백의 세계 속에서 오직 한 가지 색만이 살아 있는 이유는, 잊혀지지 말아야 할 인간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스필버그에게 색은 감정의 장치가 아니라, 기억의 증언이다. 이 방법은 지금은 흔한 방법이었지만 당시의 영화계에 큰 모험이었다. 스필버그는 현재의 첫 장면에서는 컬러로 촬영하고, 회상하면서 흑백으로 돌아간다. 마지막 현실 장면에서 컬러로 다시 돌아온다. 마치 1939년 컬러 티비가 등장했을때, '오즈의 마법사' 기법(흑백으로 시작해, 오즈의 세계로 들어오는 문을 열면서 컬러로 바뀌는 장면)을 반대로 적용한다. 영화는 영웅 쉰들러를 칭송하지 않는다. 오히려 쉰들러의 분량은 190분이 넘는 시간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오히려 나치의 비중이 더 크다. 영웅의 이야기로 관객에게 도파민을 주지 않고, 수용소 지휘관 아몬 괴트(쉰들러와 직접 만나는 장면 없음)와 수용소의 시스템 안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채워졌다.
이 영화의 역사적 배경인 폴란드는 홀로코스트의 중심지였다. 그리스어로 홀로는 '완전히'와 코스트는 '태우다'라는 단어에서 왔다. 추정으로 600 백만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와 플라슈프 같은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쉰들러는 그 현실 속에서 1,200명의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재산을 바쳤고, 전쟁이 끝날 무렵엔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이름들은 생명의 기록이 되었고, 그 명단이 바로 인류의 양심의 상징이 되었다. 전쟁 이후 그는 ‘세상을 구한 자’로 불렸으며,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묻힌 유일한 나치당원이 되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구한 이야기다. 완전한 선도, 완전한 구원도 없지만,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행동하는 한 사람의 결단이 역사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탈무드 구절 중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세상을 구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지만 구할 수는 있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불완전한 선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이 구절은 영화 스크린 위에 새긴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잊지 않고 있는가, 또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인간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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