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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침대 옆에 둔 책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by Polymathmind 2025. 9. 24.

미래가 불확실한 것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룰 것 같은 인간이지만, 시간이라는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인간(나)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이 나를 인문학, 철학에 발을 딛게했다. 자기계발서를 찾아 읽기 시작했지만 부족했다. 철학 서적으로 옮겨갔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만화로 된 쉬운 철학이야기로 되돌아갔다. 지금까지의 많은 철학자들이 방대한 사유와 이론을 내놓았더라. 그 중 '스토아 철학'이 궁금해졌다. 

기원전 3세기경, 아테네 키프로스 출신의 '제논'에 의해 시작된다. 그가 강연하던 장소가 스토아 포이킬레여서 그의 철학은 '스토아 철학'이라 불리게 된다. 이후 '크리시포스' 등이 체계를 확립했고, 로마 시대에는 '세네카', '에픽테토스' 그리고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며 절정에 이른다.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삶의 실천을 중요시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을 한다. 그들은 이성을 따르고 자연 순리에 따르는 것이 덕이라고 했다. 

'에픽테토스'의 광팬이였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통해 인간에 대한 고백을 들려준다. 

그는 로마 제국의 절정기에 권좌에 있었지만, 이 책에서의 목소리는 결코 권력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상한 존재로서의 인간, 피할 수 없는 죽음,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번뇌를 묵묵히 직시한다. 그렇기에 [명상록]은 ‘황제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 성찰’로 읽힌다.

아우렐리우스는 제국의 황제로서 끊임없는 전쟁과 정치적 갈등을 마주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적으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닥친 일은 나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단련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라는 태도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는 고통을 피하려는 회피가 아니라, 고통을 삶의 일부로 인정하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였다.

그의 성찰은 인간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명상록] 곳곳에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다스리려는 흔적이 보인다. 그는 인간이 본래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며, “남이 잘못을 저지를 때 그것은 본성에 무지하기 때문”이라 기록한다. 그렇기에 타인을 미워하기보다 이해하고, 나아가 용서하려 했다. 황제로서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력의 칼이 아니라 철학의 언어로 자신을 다스렸다. 그것은 정치적 통치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통치, 곧 ‘내면의 제국’을 세우는 일이었다.

[명상록]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것은 외부를 향한 글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향한 글이었기에 더욱 진실하다. 출판을 의도하지 않았던 기록은 꾸밈없고 간결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권력의 정점에 선 자조차 피해 갈 수 없는 인간적 고민이 응축되어 있다. 황제와 평민,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는 목소리이기에, 이 책은 필자에게 크게 다가왔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경쟁과 속도 속에서 개인을 소모시킨다. 그러나 [명상록]은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도 내면의 중심을 지키는 길을 보여준다. 아우렐리우스는 “외부 세계가 나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 그것을 허락할 때만 내가 무너진다”고 썼다. 이는 자기 통제와 자율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외부의 환경과 사건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이 선택의 자유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을,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의 고독 속에서 발견한 셈이다.

결국 [명상록]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다. 물론 그 대답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방향과 삶의 태도 그리고 선택의 조언을 얻으려면 이 책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가 [명상록]을 구매했을 때, 책 서두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일 년에 두번은 읽는다 - 빌 클린턴'. 

이제 책이 누렇게 변했다. 하지만 매일 한 챕터 혹은 한 단락씩 읽어내려가려는 선택을 했다. 일 년에 두번은 읽는 실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