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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조르조 바사리-미술가 열전, 메디치의 연출가, 운명

by Polymathmind 2025. 2. 10.

조르조 바사리

조르조 바사리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건축가 그리고 예술사로 유명한 조르조 바사리는 천재들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린 시절 교육에 적극적이었던 아버지 덕에 그의 운명은 메디치가로 흘러간다. 그는 기본적인 문학적 소양과 라틴어, 그리스-로마의 고대사 등을 섭렵하고, 소묘 실력까지 출중했다. 흘러가는 바사리는 피렌체까지 도착하고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메디치가의 망명 시절로 바사리와 메디치가의 끈은 잠시 끊어지기도 한다. 이때 그는 정치적인 흐름에서 빠져나와 오로지 미술에만 전념한다. 그러나 결국 다시 메디치가로 돌아온다. 그는 미술에 전념하며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가 로마에 머물 때 초상화의 주인공들에 대한 생애와 업적을 요약하여 붙여 놓는다. 학자, 시인, 인문주의자, 예술가, 정치가, 무인 등 카테고리를 나누어 작성한다. 이때 친구였던 파울로 조비오의 강력한 요구로 그 유명한 '미술가 열전'이 탄생한다. 

미술가 열전

책의 제목은 '가장 탁월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생애'라는 뜻으로 고대부터 바사리 시대(16세기)까지의 예술가들을 다룬다. 100명 이상의 예술가들의 전기를 담고 있고, 그들의 생애, 작품, 성격, 그리고 기술적 특징까지 서술한다. 바사리는 특히 미켈란젤로를 르네상스의 최고봉으로 칭송하며 피렌체 중심의 예술과 예술가들에게 초첨을 맞춘다. 이 책은 단순히 작품과 업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면모와 예술적 사고까지 탐구하려 노력한다. 그는 예술가들이 신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 창의력의 절정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많이 들어가기도, 자료 수집과 점증에 제한이 있어 내용이 과장되거나 오류가 많았다. 그의 '미술가 열전'은 인문학적 사고의 확장과 예술가의 지위 향상 그리고 예술의 역사적 시선으로 근대 미술사학의 기초가 된다. 

미술가 열전

메디치의 연출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사리는 메디치 가문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다. 특히 코시모 1세는 가문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예술과 문화를 이용하고, 바사리는 이 역할을 충분히 감당한다. 대표적으로 현재도 랜드마크인 우피치 궁전은 메디치 가문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난 건축물이다. 또한 '미술가 열전'에서 피렌체를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서술하며 메디치 가문덕분에 르네상스의 절정을 이뤘다고 강조한다. 

바사리는 작업은 단순한 예술적 차원을 넘어 정치적 선전과 문화적 정체성 형성의 도구였다. 지금 현대의 관점, 혹은 비권력자의 관점에서는 당시 예술의 쓰임이 부정적으로 보인다. 예술로 기억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바로크 시작점에서 루벤스와 마찬가지고 그 전 르네상스에는 바사리가 있었다. 이것은 예술이 단순한 미적 표현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와 권력을 구현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바사리의 이 작업은 르네상스를 메디치 가문과 융합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만든다. 

운명

바사리는 미술가이기도 했지만 미술을 시간 속에 나열하여 역사적 과정으로 설명하며 그의 필력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방대한 양의 메모와 자료들, 그가 다닌 수많은 도시들, 그리고 그가 만난 수많은 예술가들과 학자들에게 그의 삶을 혹사시킨다. 그의 운명은 피렌체의 코시모 1세에게 흘러 들어가며 코시모 1세와 죽음도 같이 한다. 죽음을 앞둔 주군을 바라보는 바사리는 피렌체에서의 행복했던 모든 기억들이 지나갔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장례식을 연출했던 바사리, 주군의 장례식에는 참석을 못한다. 코시모 1세가 사망한 뒤 2달 뒤 바사리도 자택에서 사망한다. 르네상스 메디치 가문의 연출가였던 바사리,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언이었다. 그가 몸소 지나온 매너리즘 화법은 바로크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완벽주의에서 탈피하며 실험적인 예술의 확장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는 그런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르네상스의 천재도 아니었고, 시대의 약자도 아니었다. 바사리가 택한 길은 무엇일까? 그는 펜과 직각자와 붓으로 시대의 기억을 한데 모아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억을 연결한 현재의 역사가였다. 

그가 죽기 전에 친구에게 전한 편지에 이렇게 쓴다. 

'나는 과거의 선배 미술가들을 모방하며 작업해 왔고, 내가 스스로를 혹사하며 일해 온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요 이상의 수고였다고도 할 수 있소, 하지만 선배 미술가들은 나만큼 좋은 조건에 처하지 못했으며, 나만큼 자연과 하나님의 은총을 느끼지 못했소. 그래서 나는 이런 유리한 여건으로부터 최대한의 것을 끌어내려 애썼을 뿐이오' 

그는 자신의 업적에 확신이 있었고, 그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예술과 예술가들로 인해 그가 도달할 수 있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