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의 학기말이 끝났다. 젊은이들과의 만남은 늘 긴장된다. 늘 부족함을 지적하는 자리는 생각보다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예술이라는 장르에서 그들의 시간은 고민과 해결의 연속임을 필자도 경험했기에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겪었던 시간과 지금 젊음이들이 겪는 시간이 같을 수 없음을 느낀다. 물리적으로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결과는 공평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그 시간을 잘 견디고 잘 이겨내고 있다. 필자는 늘 말한다. 세상은 절대로 결과에 공평하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이 중요하고 지금의 희생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고...따라서 자신을 이겨야하고, 상대와 경쟁을 해야하며, 경쟁의 결과에 승복해야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견뎌야 한다. 부족함을 스스로 찾아 해결해야하는 시간, 남과 비교 당하는 시간,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자신을 보는 시간말이다.
농경 사회에서는 계절을 기다려야 했고, 장인은 수년간의 수련을 견뎌야 했으며, 신앙과 윤리는 '인내'를 완성의 조건으로 삼았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속도와 즉각성으로 재편된다. 인내는 더 이상 필수가 아니라 비효율이 되고, 인내는 능력 부족이나 결단력 결여로 치부된다. 기다림은 약해지고 자극에는 빠르게 반응하며 지속력을 가진다. 과거에는 외부 조건을 견디는 것이었다면, 현대는 자기 자신을 견뎌야 한다. 그래서 서점에는 끊임없이 자기계발에 관련된 책들이 쏟아진다. 자기계발이라는 것도 결국 인내하지 않고 빠르게 자신을 바꾸라는 지침서가 된지 오래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인간이 통제 가능한 것과 통제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것을 지혜라고 했다. 통제할 수 없음에 기다려야 하고, 통제할 수 있음에 과감하라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배운다. 그래서 참아야 할 이유를 잃었다. 기다림은 실패의 징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예술에서의 인내는 어떨까? 예술에서 시간은 균등하지 않다. 연습의 시간은 길고 느리게 느껴지며, 무대 위의 시간은 짧고 밀도가 높다. 이 두 시간의 사이에 늘 인내가 놓여 있다. 연습의 시간이 길다고 무대의 시간이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이 불확실한 시간의 간극이 기다림 아니 머무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변화가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두는 일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이의 시간은 늘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되돌릴 수 없는 무대 위의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을 폭발시키는 찰라가 될 것이며 관객은 완성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관객은 비록 예술가의 실패와 지루함, 반복과 정체의 시간을 알아채기 어렵지만 작품의 깊이로 그것을 느낀다. 공연이 끝난 뒤, 예술가는 허탈함과 공백으로 인내하며 견뎌낸다. 이 시간은 새로운 인내가 시작되는 지점이며 다른 시간을 연결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 신뢰가 있다면 또 다른 완성을 위해 달려 갈 기회가 생긴다.
예술에서의 인내는 예술에서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왜곡된 시간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는 불안함으로 우리를 견디게만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인내는 시간에 대한 신뢰를 포함한다. 시간의 빠름이나, 시간의 소비만을 강조하기 보다 그 시간을 의미로 전환하는 신뢰가 필요하다.
우리는 인내를 회복할 수 있을까? 시간을 돌려야 할까? 무조건 기다려야 할까? 그저 견뎌야 할까?
절대 아니다.
인내는 의미 있는 시간을 찾아 자신을 맡기는 결단이다. 예전의 오래 버티는 능력이 아니라, 시간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그 시간에 나를 내던지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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