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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도시 인문학 26 -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이성의 설계, 시간을 마시는 사람들

by Polymathmind 2025. 12. 18.

지난 달, 작은 뉴스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싱글몰트 위스키 '아벨라워 더 마우스 오브 더 채터링 번 53년 1967'이 한화 약 1억 원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에든버러에서 열린 초희귀 위스키 경매에서 말이다. 에든버러는 위스키의 생산 중심은 아니지만 위스키 문화와 해석의 중심지였다. 차갑고 습한 기후 그리고 그 곳의 돌과 나무는 느린 숙성과 깊은 향을 내기에 충분한 곳이다. 이 도시에서 위스키는 과시적인 술이 아니다. 위스키는 빠르게 소비되지 않고, 대화를 동반하며, 침묵을 필요로 한다. 에든버러의 펍에서 위스키를 마신다는 것은 취하기 위한 행위라기보다,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의식이라 그들은 말한다. 차갑고 습한 기후 속에서 오랜 시간 숙성된 위스키는, 이 도시가 시간과 맺는 관계를 닮아 있다.

그런 이유인지 에든버러는 서두르지 않는 도시다. 이 도시는 방문자를 압도하지도, 즉각적인 감탄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천천히 걷게 만들고, 오래 머물게 하며, 생각하게 한다. 검은 돌로 이루어진 구시가의 골목과 질서 정연한 신시가의 거리 사이를 걷다 보면, 에든버러가 무엇보다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관심이 많은 도시임을 알게 된다.

에든버러 성이 내려다보는 로열 마일은 권력과 시민, 종교와 상업, 공적 질서와 사적 삶이 뒤섞이는 공간이다. 중세의 에든버러는 위로 쌓인 도시였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포개어 살았고, 그 밀도는 도시를 어둡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구시가의 어둠은 단지 빛의 부족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의 그림자처럼 느껴진다.

18세기, 이 도시는 자신을 다시 설계한다. 신시가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도시 형태로 옮긴 결과다. 직선, 대칭, 균형은 아름다움 이전에 사고의 질서를 의미했다. 데이비드 흄은 인간의 판단이 습관과 감정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계몽주의가 계몽주의를 의심한다. 애덤 스미스는 자유 시장을 옹호했지만, 그 기본은 '공감'이라는 도덕적 감정을 깔아놓는다. 에든버러는 이성을 믿었지만, 동시에 그 이성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알고 있었다. 이 도시는 낙관보다 절제된 확신그리고 균형을 찾아간다.

이 균형은 이 도시의 이중성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에든버러적 인간의 초상이다. 밝은 신시가와 어두운 구시가처럼, 이 도시는 선과 악, 이성과 욕망을 분리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중성을 자각한 공간이며, 과거와 현재가 대립하는 공간이 아닌, 대화하는 공간으로 만든다. 도시 자체가 허용한 작은 균열이며, 인간적인 흔들림이다.

에든버러의 음악 역시 크지 않은 음량으로 말한다. 스코틀랜드 민요의 단순한 선율, 멘델스존은 '핑갈의 동굴'에서 스코틀랜드의 바람과 바위, 그리고 도시를 감싸는 긴 침묵으로 에든버러를 하나의 느린 리듬으로 묶는다. 과장하지 않으며 화려하지 않게 말이다.

오늘날 에든버러는 여전히 생각하는 도시다. 페스티벌과 공연, 낡은 도서관과 현대적 실험 공간, 그리고 오래된 펍은 모두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이 도시는 말한다. 빠르게 소비되는 도시가 아니라, 천천히 음미되는 도시다. 에든버러를 이해한다는 것은, 도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시간을 마시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그 시간은, 잔에 담긴 위스키처럼 조용히 남아 오래도록 사유를 남긴다.

에든버러는 우리에게 '이성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돌과 숲 그리고 안개에 질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