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한다. SNS의 짧은 문장, 익명성의 언어 속에서 ‘비판’과 ‘비난’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누군가의 실수나 의견이 드러나면, 그것은 즉시 여론의 표적이 된다. 자신의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이젠 그 자유를 지키거나 내세우기엔 너무 힘들어졌다. 정작 비판의 말속에는 타인을 향한 분노와 불안, 그리고 도덕적 우월감이 섞여 있다. 비판도 언제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비판도 얼마든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점점 길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과 ‘비난’은 닮은 듯하지만 전혀 다른 단어다. 비판은 옳고 그름을 가려 판단한다는 뜻을 지닌다. 즉, 사유의 결과이며 이성의 언어다. 반면 비난은 옳지 않음을 들어 나무란다는 뜻이다. 이는 감정의 언어이며, 상대를 향한 공격의 성격이 짙다. 비판이 “왜 그런가?”를 묻는 행위라면, 비난은 “너는 틀렸다”라고 단정하는 말이다. 비판은 이해를 향해 열려 있고, 비난은 닫혀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란 책에서 비판을 ‘이성의 한계를 성찰하는 행위’로 정의했다. 우리에게 비판은 파괴가 아니라 탐구였다. 건강한 비판은 무언가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함이다. 반면 비난은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감정의 즉각적 분출이다.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이 옳다는 착각 속에 안도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확신의 함정이다. 우리는 타인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사실은 자신의 불안을 덮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는 나의 비난이 앞으로의 나를 옭아맬 수도 있다.
비난은 관계를 단절시키지만, 비판은 관계를 회복시킨다. 건강한 비판은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가진 생각의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대화의 시작이다. 즉 역지사지(공감)와 반면교사(성찰)가 필요하다. 타인의 관점에서 한번만 생각을 한다면, 그리고 타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배우는 겸허함이 있다면 더욱 건강하고 건설적인 대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비난은 대화를 끝낸다. 칼과 같다. 상대의 입을 닫게 만들고, 서로를 이해할 기회를 없애버린다. 결국 비난이 넘치는 사회에서는 불신과 침묵만이 남는다.
비판의 힘은 태도에 있다. 그것은 지적 능력이 아니라 품격의 문제다. 비판하기 전에 “나는 왜 이 말을 하는가?”를 스스로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말이 상대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가, 아니면 상처를 남길 뿐인가의 질문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러기 쉽지 않다. SNS의 빠른 업로드는 우리가 생각할 시간을 빼앗았다. 알고리즘으로 확신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 비난은 우리가 생각할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앞뒤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의견에 물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난 안에서 도덕적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비판을 받을 용기도 없다는 것이다. 남이 나를 공격할 때, 받아들이는 소화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나에게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필요 없는 것은 버리면 된다.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용감한 침묵보다 무책임한 발화가 더 많다. 그러나 진정한 비판은 목소리의 크기에 있지 않다. 그것은 사유의 깊이, 그리고 타인을 향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비판은 사람을 침묵시키지 않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이 비난과 다른 점이며,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말의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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