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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영화 '천문:하늘에 묻다, 세종대왕, 사랑, 외로움

by Polymathmind 2025. 4. 29.

이탈리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다면, 조선에는 '세종'이 있다. 예술과 과학 그리고 미래에 던졌던 질문은 두 인물에게 공통점이 많다. 세종(이도)과 다 빈치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가졌고, 인간의 한계 그리고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게 했다. 다방면에 창의적인 생각과 탐구력은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다른 점은 왕과 서자 출신, 그리고 세종(이도)은 현실의 균형을 잡으며 변화를 이끌었다면, 다 빈치는 현실과 충돌하거나 초월하려 우직함이다. 세종(이도)은 왕이라는 자리에서 현실 속의 인간을 위함이었다면 다 빈치는 현실을 너머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세종대왕

조선 4대 임금으로 이름은 이도, 즉위 연도는 1418년이다. 세종이라는 칭호는 사후에 붙은 것으로 '크게 밝은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누구나 세종(이도)의 업적은 다 알것이다. 대표적으로 훈민정음 창제로 백성들이 쉽게 읽고 쓸 수 있도록 글자를 발명했고, 이것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실용적이며 위대한 문자로 평가된다. 천민 출신의 장영실을 기용하여 물시계, 해시계, 천문관측기기 등을 개발하여 조선만의 시간과 자연을 알아낸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학문과 정책을 연구하며, 음악 이론과 국악기를 체계적으로 정비한다. 토지 개혁을 통해 세금 제도를 공정하게 하며, 북방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4군 6진을 세워 국경선을 안정시켰고, 왜구의 해적질에 대비한다. 세종(이도)은 그냥 훌륭한 임금이 아니라, 지식과 문화를 통해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던 진정한 리더였다. 그의 업적과 일생은 잘 정리된 자료들이 많으니 찾아보시길...

영화 '천문:하늘에 묻다'

2019년, 허진호 감독은 세종(이도)와 장영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필자에게 가장 힘 있게 다가온 장면은 명나라 사신이 들고 온 황제 깃발에 세종(이도)과 아들 향(후에 문종) 그리고 모든 신하가 근정전 앞에서 절한다. 이 장면은 당시 조선의 위치와 상황을 단번에 보여준다. 그리고는 장영실과의 첫 만남을 보여주며 세종(이도)의 아랑곳하지 않는 자신만의 관심사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바로 조선이었다. 세종실록 76권(세종 19년)에 따르면 가뭄으로 인한 백성들의 굶주림에 자신과 관료들의 식사자리에 보리밥과 반찬 몇 가지만 내놓게 한다. 그리고 그는 '임금의 직책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라며 식사를 했다 한다. 

그 이유는 명의 별자리를 가져다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이도)은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갖고자 했다. 이때 장영실을 만나게 되고 그의 천재성에 면천을 해주며 자유로운 발명을 하도록 해준다. 영화에서처럼 둘도 없는 사이처럼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료에 의하면 계급을 초월하여 세종(이도)의 인간 존중의 철학을 볼 수 있다. 장영실은 세종(이도)의 명령 아래 자격루(물시계), 양부일구(해시계), 혼천의(천체 관측기), 측우기(강우량 측정기), 보루각과 옥루(물시계) 등을 발명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지식과 권력의 협력, 신분을 뛰어 넘는 인간 존중, 그리고 국가의 과학기술의 체계화의 업적을 남긴다. 

사랑

브로맨스라 일컫는 남자들만의 우정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세종(이도)과 장영실의 장면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세종(이도)은 모든 통치의 중심에는 '백성'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질병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조선의 가장 큰 문제로 삼는다. 그것을 해결하기위해 관련된 여러 책을 편찬하게 한다. 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닿지 못한다. 결국 조선의 문자를 만들기로 하며 이것은 인류 문자 역사 전체를 놓고 봐도 독보적이며 지식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하는 위대한 발명이었다. 물론 사대주의에 찌든 관료들의 반대와 감시로 어려움이 많았다. 이미 장영실의 발명품들은 명나라에 간섭을 받았기에 폐기되거나 측정이 중단된다. 세종(이도)은 굴하지 않았다. 결국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훈민정음이 세상에 반포된다. 훈민정음 서문에는 백성에 대한 사랑을 담았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는 '말을 글로 옮기고, 백성이 스스로 기록하게 하려 한다'며 정확한 목적까지 기록되어 있다. 

한글의 위대함은 과학적이며, 의학적이고 철학적인 동시에 실용적이다. 배우기 쉽고 다양한 소리를 그대로 적을 수 있어 교육과 소통을 극대화한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1주일 정도면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었다.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되었으며, 지식과 생각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평등과 지적 민주화가 바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방향을 잡고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위대한 시작이었다. 그 위대한 시작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외로움

필자가 몇 년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세종의 꿈'이라는 창작 오페라를 연출했던 적이 있다. 그때, 세종대왕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다가 문득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용상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무척 외로우셨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을까? 내 편은 천민 출신의 장영실과 집현전의 소수의 학자들뿐인데, 그 많은 관료들과 명나라 그리고 우매한 백성들, 그 혹독한 현실을 어떻게 버티셨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흔히 생각하는 외로움이 아닌, 생각이 깊고 사랑이 컸기에 느낀 외로움 혹은 고독이 아니었을까? 늘 공부하며 사유하고 그리고 침묵했던 세종(이도)은 권력을 가졌지만 자유가 아닌 책임으로 그 고독을 겸허히 받으셨을 것이다. 어떻게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마음과 그 외로움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창작오페라 '세종의 꿈'

생각이 깊은 자는 말이 적고, 말이 적은 자는 외롭다. 외부와 단절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와 현실에 책임을 지키려 애쓰셨을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세종(이도)의 아버지 태종(이방원)의 입었던 피의 검은 곤룡포를 바라보며 혼란스러웠던 자신과 그 옷을 입으며 관료들 앞으로 나아갈 때, 고독과 외로움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자리에 있었던 세종(이도)은 한없이 외로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