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의 도시
서울은 기억의 도시일까, 망각의 도시일까. 경복궁과 종묘, 광화문과 덕수궁은 오랜 시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 들어선 고층 빌딩과 재개발 구역들은 과거의 결을 끊어낸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가 왕궁 앞에 세워졌고, 해방 이후에는 그 건물이 철거되어 과거의 궁이 다시 들어섰다. 이러한 반복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권력의 얼굴을 어떻게 바꾸어왔는지를 보여준다.
도시는 기억을 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서울은 종종 과거를 지우는 방식으로 미래를 만들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기억의 회복일까, 새로운 포장의 시작일까. 세운상가 철거 논란, 경희궁터의 아파트 단지 조성 등은 도시가 어떻게 과거를 ‘선택적으로’ 기억하는지를 보여준다. 서울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과거를 기억하기로 선택했는가?”
속도의 도시, 사유의 실종
서울은 빠르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속도, 24시간 배달 시스템, 매일 쏟아지는 정보와 사람들. 이 도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멈추지 않는다. 속도는 효율을 주지만, 철학은 느린 질문에서 태어난다. 서울은 과연 생각할 수 있는 도시인가?
한병철의 말처럼, 우리는 ‘성과사회’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하는 존재가 되었다. 경쟁, 비교, 자기계발은 서울의 일상이 되었고, “나는 충분한가?”라는 질문은 “나는 더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바뀌었다. 공원은 있지만 쉼은 없고, 휴일은 있지만 사유는 없다. 속도의 도시 서울은 ‘살기 위한 도시’가 되었지만,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도시’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광장의 윤리, 저항의 도시
서울은 권력의 중심이자, 저항의 중심이다. 조선시대엔 왕의 도시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식민 지배의 심장부였으며, 20세기 후반 이후로는 시민의 목소리가 모이는 저항의 광장이 되었다. 4.19 혁명, 6월 민주항쟁, 2016년 촛불집회까지, 서울의 거리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몸을 가진 장소가 된다.
광장은 도시의 얼굴이다. 광화문 광장에 서면, 단지 건물과 조형물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쌓인 목소리와 침묵, 외침과 기다림이 보인다. 서울은 그 광장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이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도시가 특정한 권력의 논리로만 운영될 때, 시민은 광장을 통해 말한다. 도시의 철학은 결국 광장에 있다.
서울은 단순한 수도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속도, 저항과 사유가 겹겹이 쌓인 ‘철학의 실험실’이다. 서울을 걷는다는 것은 물리적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과 가치, 권력과 욕망을 함께 마주하는 일이다. 도시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들어야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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