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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넷플릭스 '메시아'-진짜 vs 가짜, READY?

by Polymathmind 2025. 3. 6.

메시아 Messiah

'메시아-구원자'가 나타난다면? 2020년 넷플릭스는 예민한 주제로 질문을 던진다.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 논쟁을 거대하게 불러일으킨다.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한 청년이 팔레스타인 어느 도시의 한복판에 서서 사람들에게 코란을 읊는다. 그 도시는 포탄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다. 하지만 모래폭풍이 일어나 공격은 멈추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알-마시히'라 소리치며 그를 따르기 시작한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그를 주목하며 의심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진정한 메시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믿음과 의심의 갈등을 보여준다. 특히 현대 사회에는 정보가 넘쳐나고,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난무한다. 과연 '메시아'는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사람들은 그를 신의 아들로 볼지, 위험한 이단 선동자로 볼지의 상황을 보여준다. 또한 이슬람의 코란, 기독교의 성경을 골고루 인용하며 각자의 '메시아'가 아닌 우리의 '메시아'를 보여주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

넷플릭스 '메시아'

진짜 vs 가짜

예수는 기독교에서 '메시아'로 받아들여졌지만, 당시 로마 제국과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유대교는 아직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고 하며 기다린다. 이슬람에서는 예수가 신의 예언자로 여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메시아'가 진짜인지 가까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현대에는 종교적 권위가 약해졌고, 신보다는 과학을 신뢰하거나 권력을 따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플라톤이 질문한 것처럼 사람들이 기존의 신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리를 바라볼 준비가 되었을까? 

'메시아-알 마시히'는 모래폭풍을 일으키기도 하고, 감옥을 탈출하기도 하고, 총에 맞은 소년을 구하기도 하고, 중동에서 미국 텍사스로 하루 만에 넘어오기도 하고, 워싱턴 DC의 링컨 동상 앞에서 물 위를 걷는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털끝하나 상하지 않았다. 고학력 직업군의 사람들(이스라엘 비밀경찰, CIA)은 조작이고 심리적으로 대중들을 조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나 존재를 만났을 때, 정말인가? 하는 의심을 하는 것이 본능이다. 점점 속임수도 정밀해지고 상상을 초월해졌다. 이젠 진짜 '메시아'가 나타나면 위험한 거 아니야? 사람들 선동하는 거 아니야? 광고야? AI가 만든 건가? SNS 조회수 올리려고 하는 거 아니야? 하며 경계할 것이다. 이젠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세상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는 구별이 될까? 드라마에서는 이 모든 것을 밝히지 않는다. 진짜 기적이어서 설명이 안 되는 것도 있고, 어떤 기적들은 충분히 속임수라고 설명이 가능하기도 하다. 애매한 경계선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당신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 진짜와 가짜는 절대적으로 구별될까? 객관적,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면 진짜고, 증명이 안되면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렇게 명확하지 않다. 사랑, 감동, 영적 체험은 측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결정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각자의 믿음일 수도 있다. 선택이란 말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기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게 아닐까? 나에게 진실이 남에게 거짓일 수 있다. 우리는 답이 없는 인생을 살면서 계속 선택한다. 아니 선택해야 한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보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여 받아들이고, 그 선택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더 중요하다. 

READY?

몇일 앞의 글에서도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냥 짜인 프로그래밍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선택이 있어야 가치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는 것도 그들의 의지였다. 신은 먹으면 벌 받는 사과나무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게 심어놓고, 그들이 먹을 때, 말리지도 않았다. 신은 선악과를 만들며,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창조하신 것 아닐까? 우리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커가면서 본인의 선택이 성장의 기회를 주고, 그것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니까. 아마 신도 그걸 원하지 않았을까? 선과 악, 이기심과 이타심, 믿음과 의심의 사이에서 인간은 더 성숙해지고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택에는 늘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선택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쉽지 않다. 어쩌면 아직 아닐수도 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존재지만, 선택할 준비가 되어있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다.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을까? 그건 상황이 과연 있을까? 지금까지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나는 그냥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완벽한 준비 없이도, 우리가 선택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의 질문이다.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다양한 시각에서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맹목적인 믿음이나 지나친 회의주의 등을 경계할 수 있게된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신중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선택의 준비는 '완벽함'이 아니라 '깊은 사고'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넷플릭스 '메시아'는 나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내가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을까? 기적을 보고도 내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않을까? 주변의 시선이나 사회적 분위기에 묻어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말이다. 당신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