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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낭만주의 미술 - 프란시스코 고야, 어둠, 광기

by Polymathmind 2025. 5. 20.

격변 속에서 태어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스페인 아라고나 지방의 작은 마을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고, 마드리드에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작품에 감동을 받았다.  30대에는 왕실의 주문을 받아 태피스트리(벽걸이 직물) 디자인을 하며 궁정에 발을 들였고, 귀족들의 초상화로 명성을 쌓으며 1786년에는 마침내 왕실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1793년, 원인불명의 병(콜레라에 의한 고열설)으로 청력을 완전히 잃게 된 그는 내면의 심연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프랑스혁명의 이상에 이끌렸고, 철학책들을 탐독한다. 이후 그의 그림은 점차 화려함을 버리고, 인간의 고통과 광기, 사회의 모순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권력에서 고발자

고야는 체제 내부에서 활동했지만, 점점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키워갔다.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지만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공한 1808년, 그는 그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의 비극을 기록한 '1808년 5월 3일'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학살당하는 민중의 공포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며, 전쟁을 미화하지 않고 인간성의 파괴를 드러낸다. 또한 판화 연작 '로스 카프리초스'에서는 성직자, 귀족, 민중까지 모두를 풍자하며 인간의 어리석음과 사회적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특히 부패한 가톨릭 교회의 실상을 고발했다. 이 작품은 카툰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 판화집의 부제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단순한 비평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철학적 경고로 읽힌다.

광기의 심연을 그리다

고야의 말년은 외로움과 침묵으로 가득했다. 그는 별장 ‘카인트로 데 피엔타’에 머물며 벽에 직접 그림을 그렸고, 이 작품들은 나중에 '검은 그림들'이라 불렸다. 대표작인 '사투르누스가 아들을 잡아먹다'는 신화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 안에는 권력의 불안, 인간의 본능적 폭력, 그리고 존재의 공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는 고전적 미의 기준을 철저히 해체하고, 심리적 불안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선구적 작업이었다. 그의 이런 시도는 훗날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고야를 근대미술의 문을 연 인물로 만들었다.

고야는 단순히 그림을 그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시대의 폭력과 인간의 내면을 붓으로 기록한 예언자였고, 진실을 마주하는 예술의 본질을 일깨운 철학자였다.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미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 고야는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의 얼굴을, 그 어두움까지 포함하여 정말로 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