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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허블의 시선 - 확장, 침묵 그리고 존재

by Polymathmind 2025. 6. 4.

지구 너머를 응시하는 인간의 의지

1990년 4월 24일 NASA가 쏘아올린 허블 우주 망원경은 단순한 관측 장비를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의 시선을 우주의 심연으로 확장한 기술적 사유의 결정체다. 지상 망원경이 대기의 왜곡에 제한을 받는 반면, 허블은 대기권 밖에서 작동하며 빛의 흔들림 없이 우주의 빛을 포착한다. 이는 인간의 감각 한계를 기술로 극복한 상징이며, '보는 것'의 철학적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든다. 플라톤은 감각을 넘어선 이데아의 세계를 상상했지만, 허블은 기술로 감각의 벽을 넘었다. 인간은 더 멀리, 더 깊이 바라보고 싶어 하는 존재다. 이 '시선의 확장'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우주의 일부라는 자각에서 출발한 질문이자,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존재론적 태도다. 허블은 단순히 우주를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위치를 성찰하게 했다.

우주의 침묵, 해석의 언어를 얻다

허블이 촬영한 ‘허블 딥 필드’ 이미지는 단지 우주 사진 한 장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하늘의 한 점을 장시간 노출 촬영한 결과, 수천 개의 은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인간이 ‘무(無)’라고 여겼던 공간이 사실은 수많은 ‘존재’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허블은 그 ‘무’의 자리에서 수많은 빛과 질서를 발견했다. 우주의 침묵은 허블이라는 해석의 도구를 통해 언어가 되었다. 과학이 감지한 ‘침묵 속의 울림’은 철학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보이지 않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허블은 말한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은 실제로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세계였을 뿐이다. 이로써 인간은 무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존재의 겸허함과 우주적 자각

허블이 포착한 우주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인간 존재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가 속한 지구는 태양계의 작은 행성이고, 태양계는 또 하나의 변두리 은하에 불과하다. 허블은 우리 은하계 밖의 수많은 은하, 은하군, 그리고 그 너머의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위치를 극단적으로 축소시킨다. 하지만 이 축소는 곧 철학적 전환점이다. 인간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존재다. 이는 철학자 칸트가 말한 “두 가지 경이로움”(별이 빛나는 하늘과 도덕 법칙을 인식하는 인간의 이성)을 상기시킨다. 허블은 그 첫 번째 경이로움을 시각적으로 증명했고, 인간은 그 이미지 앞에서 두 번째 경이로움을 다시 되새긴다. 인간은 작지만, 우주를 해석하고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위대하다. 허블은 우리에게 침묵하는 우주를 보여주지만,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