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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 - 우리가 잃어버린 것 3

by Polymathmind 2025. 7. 22.

정직은 도덕이 아니라 실존의 태도다

우리는 종종 정직을 ‘착한 사람의 덕목’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직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도덕적 규칙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태도이자, 실존적 결단에 가깝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스스로가 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기만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불성실’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이 스스로를 기만하며 사회적 역할에 안주할 때 진정한 자유를 상실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정직은 단순한 말의 진위를 넘어, 내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진실된 태도로 살아가는지를 묻는 실존의 물음이 된다.

왜 정직은 외롭고 고통스러운가

정직은 종종 고독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정직함을 회피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관계’를 흔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타인과의 조화와 인정 속에서 안정을 느낀다. 그러나 정직은 때로 이 균형을 깨뜨린다. 미셀 푸코는 “진실을 말하는 파르레시아(진언)는 항상 권력의 경계와 부딪친다”고 말했다. 권력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어 하며, 진실을 말하는 자는 배제되거나 조롱당하기 쉽다. 정직은 용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기꺼이 외면당할 수 있다는 각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내면의 진실을 지키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관계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힘

흥미로운 것은, 정직이 때때로 관계를 깨트릴 수 있지만, 결국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이다.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 체르니케슈는 “거짓은 즉각적인 평화를 주지만, 정직은 지속적인 신뢰를 만든다”고 했다. 신뢰는 한 번 만들어지면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 매우 어렵다. 정직은 일시적인 긴장과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관계의 본질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가족, 친구, 연인, 그리고 국가 공동체에까지 적용되는 보편적 윤리다. 정직은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관계의 조건인 셈이다.

디지털 시대의 정직, 존재의 투명성은 가능한가

오늘날 우리는 정직을 윤리로 배우기보다는 ‘전략’으로 익힌다. 자율적으로 정직하기보다는, 드러날 수 있으니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에 가까운 얄팍한 정직이 판을 친다. 디지털 시대의 자기표현은 대부분 '의도적 구성'이다. SNS 속 우리는 필터링된 삶, 이상화된 이미지로 존재하며, 진실보다는 효과적인 연출을 추구한다. 이 시대에 정직하다는 것은, 남에게 멋져 보이는 내가 아니라, 불완전한 나 자신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이는 기술적 투명성과는 다르다. 인간적 정직은 완벽한 정보의 개방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성찰된 고백’에 가깝다.

정직은 살아내야 할 철학이다

정직은 선택일까, 운명일까?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정직은 때때로 고통을 수반하고, 고립을 부르며, 손해를 감수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정직은 고결한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연습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기 위한 불완전한 실천이다. 우리는 완전히 정직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정직을 진심으로 추구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정직은, 단지 ‘말의 진실’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