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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낭만 - 우리가 잃어버린 것

by Polymathmind 2025. 8. 13.

감성의 언어로서의 낭만

낭만은 종종 일상의 균열 속에서 불현듯 찾아온다.
가을 저녁, 낙엽이 바람에 부유하는 순간에, 혹은 빗소리를 들으며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실 때 우리는 일종의 ‘정지된 시간’을 경험한다. 그 순간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얇은 막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감성의 세계에서 낭만은, 논리와 효율의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시란 사고가 노래로 변하는 순간”이라고 했는데, 낭만적 순간이 바로 그러하다. 누군가에게는 한 장의 오래된 사진이, 다른 이에게는 낡은 편지나 오래된 노래가 그 문을 연다. 낭만은 ‘더 나은 현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더 깊게 느끼는 방식이다.

역사 속에서 피어난 낭만

낭만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기분을 넘어, 한때 유럽 사회를 뒤흔든 사상적·예술적 흐름을 가리키기도 한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은 이성과 질서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감정, 상상력, 자연과의 친밀성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에 반발한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은 이성을 넘어선 인간의 내면과 자유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낭만주의(Romanticism)다.
베토벤은 교향곡 3번 ‘영웅’에서 혁명과 자유의 열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냈고,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시골 들판과 시냇물에서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발견했다. 독일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고독한 인간이 자연의 장엄함 앞에 서 있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 그림 속 인물은 정복자가 아니라 사유하는 존재이며,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한다. 낭만은 이렇게 현실의 규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었고, 개인의 고유한 목소리와 감정에 귀 기울이려는 시도였다.

철학 속의 낭만

철학적으로 낭만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와 깊이 연결된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자연의 숭고함을 통해 이성이 닿지 못하는 차원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세계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예술”로 이해하며, 예술이 현실의 고통을 초월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낭만적인 태도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부조리와 고통을 인식한 뒤, 그 속에서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의지다. 고흐는 푸른 하늘과 노란 밀밭 속에 자신의 고독을 담았지만,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삶의 격렬한 체험이었다. 독일 철학자 노발리스는 “낭만이란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유한한 것을 무한하게, 가까운 것을 멀리 있는 것처럼,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을 친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정의야말로 철학 속 낭만의 본질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낭만은 단순한 감정도, 일시적인 기분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다른 빛으로 비추는 감각, 그리고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루는 사유의 방식이다. 감성의 차원에서 낭만은 순간을 깊게 느끼게 하고, 역사 속에서 그것은 시대의 억압에 맞선 예술적·사상적 저항이었으며, 철학 속에서 낭만은 존재와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힘이 된다. 오늘날의 낭만은 더 이상 고전적인 시구나 먼 바다의 모험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퇴근길 지하철 창 너머 스치는 노을빛, 누군가의 웃음 속에 깃든 온기, 혼자 걷는 밤거리의 바람,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낭만의 조각들이다.                                                                             

결국 낭만은 현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