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코른골트의 세 번째 오페라이다. 그의 음악은 풍부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바그너, 슈트라우스, 푸치니의 느낌을 모두 담고 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주역인 테너와 소프라노의 음악은 일반 성악가들이 소화하기 어렵다고 한다. 테너는 2시간 동안 노래를 불러야 하며 소프라노는 높은 음을 사용하여 두 주역의 캐스팅이 늘 숙제로 남게 하였다. 내용도 일반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죽음과 기억, 환상 그리고 욕망이 얽힌 복잡한 심리가 담긴 작품이다.
도시와 기억
코른골드의 오페라는 벨기에의 브뤼헤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그려지는 브뤼헤는 단순한 지리적 도시가 아니라, 주인공 폴의 내면을 시각화한 상징적 공간이다. 폴은 일찍 죽은 아내 마리의 흔적을 집 안 곳곳에 보존하며, 그녀의 머리카락까지 성물처럼 간직한다. 브뤼헤의 정지된 운하와 고요한 거리들은 그의 슬픔과 애도를 반영하는 거울처럼 작용한다.
이러한 도시의 이미지는 단순한 무대 장치가 아니라, 인간이 상실을 겪을 때 빠져드는 정신적 고립을 보여준다.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현실 안의 또 다른 공간)’ 개념을 빌리자면, 이 도시는 외부 세계라기보다 상실의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형성된 내면의 무덤이다. 살아 움직이는 도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죽음과 정지의 도시만이 남아 있다. 따라서 ‘죽음의 도시’라는 제목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애도와 기억에 사로잡힌 인간 정신의 풍경을 가리킨다.
이처럼 도시가 ‘죽음의 상징’으로 전환되는 순간, 관객은 폴의 개인적 상실을 넘어 보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기억은 인간을 살리는가, 아니면 옭아매는가? 죽은 이를 붙들려는 행위가 삶을 지탱하는 힘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과도하면 결국 현실을 마비시키는 굴레가 된다. 코른골드는 도시라는 공간적 메타포를 통해, 기억의 이중적 성격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욕망과 환영
폴의 삶에 나타난 무희 마리에타는 단순히 새로운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죽은 아내 마리와 놀라울 만큼 닮아, 폴에게 아내의 부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마리에타는 실제 살아 있는 인물이자 욕망의 주체로서, 폴을 현실로 이끌기도 한다. 그녀는 죽은 자의 대체자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삶을 열어줄 가능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에로스(Eros, 생명 충동)와 타나토스(Thanatos, 죽음 충동)는 이 인물에게 절묘하게 겹쳐진다. 마리에타는 폴을 삶으로 끌어내는 에로스의 힘이지만, 동시에 죽은 아내와 혼동되면서 그를 죽음 충동의 굴레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욕망과 죄책감, 부활과 환영이 교차하는 순간, 그녀는 단순한 여성이 아니라 주인공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는 심리적 거울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환영이 가지는 힘을 본다. 인간은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종종 대체물을 통해 그 부재를 메우려 한다. 그러나 그 대체물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오히려 상실의 공허함을 더 깊이 드러낸다. 마리에타의 존재는 바로 이 딜레마를 무대 위에 구현한다. 그녀는 현실적인 존재이지만, 폴의 욕망 속에서는 환영으로 변모하며, 결국 인간이 상실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기 위해 어떤 심리적 장치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환상에서 현실로
오페라의 절정에서 폴은 충격적인 환상을 경험한다. 그는 마리에타를 목 졸라 죽이는 꿈을 꾸며, 그 순간 자신의 집착과 파괴적 충동을 직면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으로 밝혀지고,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죽은 아내의 기억에 매달려 있었음을 자각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인간이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것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학 개념을 적용해 보면, 폴은 오랫동안 상상계(Imaginary) 속에 갇혀 있었다. 죽은 아내의 환영과 그것을 닮은 마리에타의 모습은 그에게 상상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속에서 살해라는 극단적 장면을 경험하면서 그는 환영과 대면하게 되고, 비로소 상징계(Symbolic)로 돌아올 수 있다. 현실의 언어와 질서 속으로 귀환하는 순간, 그는 마침내 죽음을 인정하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길을 선택한다.
애도란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꿈의 체험은 그 과정을 강제하는 장치다. 코른골드의 음악은 이 장면을 격정적으로 묘사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애도의 고통과 해방을 동시에 체험하게 한다. 이 오페라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보편적 울림을 갖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코른골드의 '죽음의 도시'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인간이 어떻게 기억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지를 보여주는 오페라다. ‘죽음의 도시’라는 배경은 내면의 무덤을, 마리에타는 욕망과 환영을, 꿈속의 살해 장면은 죽음을 직면한 뒤 찾아오는 해방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중요한 인문학적 질문을 던진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기억은 어떻게 인간을 지탱하면서도 속박하는가? 그리고 애도는 어떻게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가? 코른골드의 음악은 이 질문들을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감각과 정서로 체험하게 한다.
결국 '죽음의 도시'는 개인의 심리극을 넘어, 인간이 보편적으로 마주하는 죽음과 기억의 문제를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상실은 누구에게나 닥치는 삶의 일부이며, 그 과정 속에서 환상과 현실, 욕망과 해방은 끊임없이 교차한다. 코른골드가 보여준 폴의 여정은 바로 우리가 애도를 통해 죽음을 넘어 삶으로 향해야 함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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